쉬는 날인데 최근 청강하는 웹소설 강사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휴강이다. 집에서 쉴까 하며 핸드폰을 뒤적거리다가 배리어프리 영화제 소식을 들었다. 장소는 한때 자주 다니던 영상자료원. 오랜만에 먼 나들이를 하려고 길을 나섰다. 멀리까지 간 김에 영화 두 개를 보고 오기로 결심했다.
시라토리 씨에 대한 다큐는 호기심을 끄는 주제였는데 어떻게 눈이 보이지 않는데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 같은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미술 작품 감상을 잘할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는 미술을 감상하는 법 외에 삶에 대한 큰 교훈이 담긴 다큐여서 먼 길 다녀온 보람이 있었다.
시라토리 씨가 ‘가만히 있을 때는 실제 존재하는지 헷갈린다’고 한 말은 내가 보청기를 빼놓고 있을 때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잃어버리면 내가 살아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든다. 비장애인은 가만히 있어도 소리가 들리니 끊임없이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은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살아있음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다.
시라토리 씨는 그룹을 지어 같이 미술관에 가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묘사를 듣는다. 작품에 대한 해설을 듣는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작품이 어떻게 보이는지 설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는 일방적이지 않고 시라토리 씨도 설명으로 들은 작품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말한다. 그게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가 예술을 감상하는 법이다. 그는 길을 걸을 때 흰 지팡이 외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그렇게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도 한다. 가슴 정도 높이에서 찍은 거리의 풍경은 비슷하지만 시각장애인이 찍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자신을 사진작가라기보다는 사진 활동가로 불리기 원한다. 40만 장의 사진 일기를 찍었지만 그는 자신의 사진 일기를 읽지 않는다.
시라토리 씨는 맹학교를 졸업하고 직업교육을 받아 안마사 생활을 20년 이상 한 예술 활동가다. 라디오에 출연해서 인터뷰도 하는 등 아주 활발히 활동한다. 어릴 때 할머니는 그에게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보다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다큐에 출연한 친한 지인인 예술가가 시라토리 씨에게 묻는다. ‘영상이 뭔지 아나?’ 시라토리 씨는 한쪽 눈이 약시로 성인이 될 때까지는 조금 볼 수 있었는데 ‘알지만 모르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그는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혼자서 부딪히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하며 거침없이 다닌다. 논 옆으로 난 길도 걷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직원에게 도움을 청해 대화를 하며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직원이 팔꿈치를 잡을 수 있게 내주면 그는 부딪히지 않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인도에서는 노란 블록을 따라 걷지만 어디에나 무단 주차한 자전거가 있어서 위험하다. 하지만 길이 막혀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활동지원사 없이 전철을 탄다. 꿈의 집이라는 체험 미술관에 가서 비장애인과 함께 하는 활동도 하고 시각장애인 예술가 체류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생활을 전시 작품으로 내놓는다. 관객은 시라토리 씨와 같이 그림을 보며 그에게 설명하는 시간을 갖고 시라토리 씨의 일상을 관찰한다. 그는 뉴스를 2배속에 가까운 속도로 듣는데 사람들은 빠른 말을 알아듣는 그를 신기해한다. 항상 1배속으로 방송을 보던 나도 집에 와서 1.5배속으로 따라 해 보니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처신해야 한다’ 보다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게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작품을 모두 다르게 이해한다는 걸 알게 된다. 정답은 없다. 볼 수 있는지 없는지 보다 중요한 건 소통하면서 장벽을 없애는 것이다. 그에게 행복이란 얘기가 통한 ‘순간’이다. 나중에 떠올렸을 때 확신하고 믿을 수 있는 순간.
영화 끝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영화의 주제와 아주 잘 어울렸다.
왜 밖을 보는 거야
모든 건 이 안에 있는데
전시를 보러 가면 다른 사람과 같이 가도 늘 각자 보고 나왔는데 시라토리 씨처럼 대화를 나누며 감상을 공유하면 즐거운 관람이 될 것 같다. 내가 뭘 보았나를 넘어서 서로 느낀 점을 풀어내면 나만 아는 세계에서 다른 사람의 영역까지 더 넓은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말엔 미술관에 가봐야겠다.
* 제15회 서울 배리어프리 영화제는 11월 4일부터 11월 9일 일요일까지 진행되니 관심 있으신 분은 한 번 다녀오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