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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나다의 패션 디자이너

졸업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by Sean

토론토 옆에만 있는 뉴욕만 해도 패션 디자이너며 인턴이며 뭐가 참 많은데, 비행기로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 여기 토론토에는 패션 디자이너는 커녕 패션 관련 직업 찾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유학하기 전에는 다들 취업이 잘된다는 과인 요리학과나 보육교사를 할 수 있는 ECE 쪽으로 많이 가길래 나는 취업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패션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졸업만 하면 다 잘 풀릴 줄 알았는데, 여기는 참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한국에서 학부 다닐 때는 디자이너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가, 여기 이만리 정도 떨어진 캐나다 토론토에서 패션 디자이너(아직은 어시지만)로 일을 하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디렉터인 A와 또 다른 패션 디자이너 어시스턴트인 B 이렇게 우리 셋이 디자인 팀이다. 본사는 텍사스에 있는 미국 기업으로, 골치 아픈 그래픽 티셔츠 하나 때문에 론칭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중이다. 나는 Sean이라는 이름으로 쓰고 있어서 우리 팀은 ABS. 복근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어이없어서 웃음만 나온다.


필리핀과 독일 혼혈이지만 캐나다인인 A, 브라질에서 온 B, 그리고 한국에서 온 나. 이렇게 셋이서는 토론토 디자인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다음 달이면 그래픽 디자이너인 R도 함께 사무실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B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그래도 나보다 월등히 잘하는 건 사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패션 디자이너'라고 말하기 굉장히 부담스럽다. 흔히 떠올리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은 패션 디자이너 일보다는 거의 잡무에 가깝다. 나는 내가 디자이너가 되면 진짜 멋있게 매번 번뇌에 사로 잡히고 창작 욕구에 불타고 갑자기 재봉틀로 뭔가 뚝딱 만들어 내는 줄만 알았는데. 디자인하는 시간보다 거래처랑 연락하고 이 디자인에는 어떤 단추를 쓸까, 어떤 지퍼 색깔을 쓸까 고르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길다.


이런 게 사람 사는 건가 싶다.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영어를 잘할지 부러워했고, 외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멋져 보였나. 현실은 그냥 그런 영어와 함께 하루종일 일러스트만 하는 날도 있고, 디자인을 안 하는 날이 훨씬 더 수두룩하다.


무급으로 버텨낸 지난 5개월, 그리고 돈 받고 일한 지 어연 2개월 하고도 반, 벌써 함께 일한 지 7개월 반. 시간 한 번 더럽게 빠르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적응해나가고 있는데. 아~ 여기는 아직도 토요일 오후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주말에서(모든 직장인 분들의 소망일 거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이 퍽 싫지 않다.

IMG_0762.JPG 옷 회사에서 일하면 좋은 점 중 하나. 여러 샘플들을 그냥 가져다가 입을 수 있다는 사실? 이번에도 한 20개 정도 가져온 거 같은데, 빨리 또 샘플털이 해주면 좋겠다. 소소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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