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미워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

by Sean

2018년, 진지하게 사귀던 첫 남자친구와 5년의 연애 마침표를 찍었다.

17살부터 22살까지,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함께한 그는, 전역 6개월을 남겨두고 헤어지자는 말조차 자기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정도로 비겁했다.


부대 뒤에 숨어서, 페이스북 메신저 뒤에 숨어서, 그렇게 그는 '미안해' 한 마디로 우리의 5년을 끝내버렸다. '나만 놓으면 될 관계면 네가 네 입으로 직접 얘기'하라는 나에게 돌아온 그의 대답은 '미안해' 세 글자.


그래서 꽤 오랜 시간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의 5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 같아서, 미안해라는 세 글자로 끝나버릴 쉬운 관계였나 싶어서,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지 인정받고 싶어서, 내 기억으로는 10개월 정도는 힘들어했고, 그 이후로도 간간히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불쑥불쑥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글을 썼다.


처음에는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으로 아무 사진이나 올려서 그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하게 읽어보기도 하고, 이런 멋진 말을 내가 쓴 거냐면서 감탄하기도 했다. 그게 나와 일기가 만난 첫 인연이다.


하루는 그가 너무 미워서 비공개 계정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타이핑을 하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굴러다니는 노트 하나를 잡아들고 내가 느끼는 감정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냥 머리에 막 돌아다니는 것들을 썼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게 눈물을 흘려서인지, 내 마음을 적어 내려 가서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나아졌다. 그를 미워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잠을 청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일기란 매일 쓰는 것이 아닌, 그냥 내 마음이 조금 어지러울 때 찾는 간헐적인 것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는 기억이 잘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에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용서하는 '척' 글을 썼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나에게 끝까지 좋은 사람이다. 내가 단단하게 이겨낼 수 있게 이런 시간을 만들어주다니.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그에게 마지막까지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와 같은 글을 써냈다.


사람은 자기 일기에도 거짓말을 쓴다고 하던데.


좋지 않게 헤어졌지만, 그는 당연히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고 내가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 당시에는 내가 상처받은 것에 집중하고, 나의 마음에 대해 더 솔직할 것을, 생각하며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은 모두 다 일기에 쓰고 그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아, 어쩌면 내가 그에게 매일 사랑일기(?)를 800일이 다 될 때까지 써줬던 게 지금 일기를 꾸준히 쓸 수 있게 한 비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헤어지고 같은 동네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지만, 나는 네가 너무 미워서, 그리고 너에게 고마워서, 또 미안해서,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짧은 5년도 못 버틸 거면 어떻게 결혼을 하고 살지,라는 생각에 결혼도 안 하겠다 비혼 선언을 한 어린 나의 철없던 모습이, 남자에게 받은 상처라며 다가오는 남자들에게 남자는 다 똑같다며 응석을 부린 나의 어린 모습이, 느리지만 상처를 회복하는 나의 모습이, 그리고 나의 시간들이 다 일기에 녹아있다.


네가 미워서 시작한 일기 쓰기가, 이제는 나를 일으켜주고 또 나를 더 나로 살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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