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보온 도시락을 아시나요?

악어새 책방 둥지의 문장들

by 효진씨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갔었다.


교실에서 집에서처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보온 도시락의 등장은 당시 어른들 입에서 "세상 좋아졌다. 라떼는...."이라는 문장을 절로 부르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지금은 북한에서도 혼수로 말하는 쿠쿠밥솥을 쓴다고 하는 세상이지만 내가 8살이던 89년에는 보온 도시락계의 에르메스는 일본제 코끼리 보온 도시락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첫 번째 아이가 학교에 가지고 가는 첫 도시락만큼은 좋은 도시락을 사주고 싶었던 나의 엄마는 무리를 해서 빨간색 코끼리 보온 도시락을 장만했다. 코끼리 보온 도시락은 베이지 색 플라스틱 밥통과 반찬 통을 모두 빨간색 보온 용기 안에 넣어 보온을 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외형이 꼭 어몽어스 같고 머리에 앙증맞은 손잡이가 있다. 하지만 보온을 위해 두껍게 만들어진 외형에 들어가는 밥통과 반찬 통이 작아서 나는 늘 점심을 먹고도 배가 고팠다. 그리고 작은 반찬 통에는 엄마가 꾹꾹 담아 넣어준 계란말이 세 알과 멸치 볶음이 들어가면 가득 차버려서 함께 넣어주시던 양반김이 없다면 밥만 덩그러니 남아버리는 거다.


그럼에도 점심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부터 신이 나는 순간이 있다. 빨간 보온 용기를 열고 그 안에서 반찬 통을 꺼낸다. 첫 번째 반찬 통에 단무지가 들어있으면 그때부터 살짝 가슴이 두근 거린다. 두 번째 반찬 통을 꺼내 서둘러 뚜껑을 열었다. 밥이다. 반찬 통에 밥이 들어있다는 건 밥이 들어있어야 할 곳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레라이스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 에피소드를 응답하라 1988에서 보고 엄청 웃었다. 드라마의 소재가 될 정도로 국룰)


보온 용기 가장 밑에서 아침에 엄마가 팔팔 끓여서 넣어 주었을 카레라이스가 먹기 적당한 온도를 자랑하며 여전히 김이 나고 있다. 따뜻한 카레에 밥을 넣고 쓱쓱 비벼서 박박 긁어먹으면 베이지 색 플라스틱 밥통은 어느새 카레 색으로 물들어 있다. 어쩌면 이 카레 색은 몇 달 동안 빠지지 않고 그대로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좋다. 한동안 밥통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카레향을 맡으면서 기분이 좋을 테니까.


고등학교에 들어가고는 도시락을 두 개씩 들고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어몽어스 같이 예쁘고 앙증맞은 코끼리 보온 도시락보다 크고 가벼웠지만 못생긴 국산 도시락을 들고 다녔다. 코끼리 보온 도시락이 지브리풍 어린이라면 수험생의 도시락은 아이언맨이다. 엄마가 아침에 담아준 카레가 점심시간에도 여전히 팔팔 끓고 있다. 스테인리스 아이언맨은 카레 색이 배어들지도 않는다. 카레를 담아도 짜장을 담아도 아이언맨에게서는 쇠 맛이 난다. 하루에 16시간은 공부를 해야 하는 수험생에게는 역시 무쇠 기운이 필요하다.


수능 전전날 엄마는 수능날은 소화가 잘되는 국과 밥을 싸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고기를 듬뿍 넣은 카레라이스를 싸달라고 했다. 고등학교 3년의 노력을 평가받는 날. 수험장에서 열었던 아이언맨 도시락 밭통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라이스를 품고 있었다. 나는 반찬 통에 반찬 대신 담겨있던 밥을 꺼내 카레에 넣고 야무지게 비벼서 싹싹 먹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수능시험을 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엄마도 나도 한동안은 도시락을 싸거나 먹을 일이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부엌 맨 위 선반에는 아이언맨 보온 도시락이 있었다.


학교를 다니느라 애를 썼던 나의 12년 시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던 엄마의 노고가 들어있다. 매일 저녁 반찬을 고민하는 것도 귀찮아 시켜 먹기 일 수인 나는 엄마에게 어떻게 매일 조금씩은 다르게 도시락을 싸주었냐고 물었다. "그래도 너는 카레를 좋아해서 쉬웠어."라고 대답하는 엄마를 보며 카레는 참 든든하고 착한 도시락 반찬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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