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새 책방 둥지의 문장들
성취주의자의 딸은 필연적으로 목표지향주의자가 된다.
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새 학기가 시작하면 아빠는 일 년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평균 몇 점, 반에서 학교에서 몇 등, 수능 몇 점, 어떤 대학으로 특정되던 목표를 한 번도 달성해보지는 못했지만 늘 높은 곳을 바라봐야 근처라도 가야 한다는 아빠의 말을 나는 거부하면서도 신봉했다.
20대와 30대 초반의 나의 목표는 돌아보면 '잘 노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잘 놀 수는 없을 정도로 잘 놀기. 놀다가 죽을 수도 있겠군이라는 시간들을 보내며 나는 성취주의자의 딸답게 계획적이면서도 열정적으로 놀았다. 엄마에게서 너는 내일 죽어도 여한은 없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아마 놀아본 사람만 알 지도 모르겠다.
서른 다섯 조금 늦깎이 엄마가 되어서도 나는 좋은 엄마가 되는 일에 몰두했다. 나오지 않는 젖을 쥐어짜며 유난스럽게 유축을 해 모유를 먹였고 단유를 하며 울었다. 사서 먹일 수도 있는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쌀을 갈고 야채와 고기를 다졌다. 나는 도서관에 있는 육아서적을 싹쓰리해 읽는 포대기를 한 프랑스엄마이면서 일본엄마이면서 독일엄마이었다.
그날들을 지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서야 나를 위한 키워드에 대해 다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새로운 단계에 도전하는 게이머처럼 나는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땄다. 엄마로서 온전히 보낸 그 3년 시간은 나를 간절히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부농이 엄마로만은 살 수 없었다. 나의 이름을 되찾아야 했다. 무엇보다 나의 밤과 나의 주말을 되찾고 싶었다.
그 절박한 시간, 내 손을 잡아 주었던 것이 글이었다. 사실 그 모든 목표지향적인 삶 속에 늘 글 쓰는 내가 있었다. 일기를 썼던 나와 시나리오를 쓰던 내가 있었다. 미사와 기도모임용 묵상 글을 쓰고 싸이월드에 감성 어린 주접을 떨던 내가 있었다. 그렇게 간절히 다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부농이 엄마에게 출판사 땜방 알바가 주어졌다. 비록 쿠키런 만화책 한 꼭지였지만 '콘텐츠 글 장효진'이라고 박힌 내 이름을 보자마자 쓰고 싶은 열망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커다란 조류가 되어 터져 버렸다. 글 장효진이라고 박혀있는 책을 갖고 싶다.
2025년의 나는 동화를 쓰고 있다. 왜 동화였을까? 왜 동화여야 했을까?
꼭 누구 하나는 죽어나가는 조폭들 대화로 가득했던 시나리오 합평 모임에서 나는 늘 꽃을 단 평화주의자였다. 효진씨도 잔인한 글을 맛깔나게 쓸 수 있어라는 응원을 받으면서도 나는 욕을 하며 누군가를 때릴 수 없었다.
나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곳에서 혼자 야무지게 노는 아이를 무대에 불러내서 세상사람들에게 "보세요! 보세요! 이 아이가 이렇게 잘 논답니다."하고 자랑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니 동화여야 했다. 상반기 3개월간 3편의 단편 동화 초고를 썼다. 미숙함과 어리숙함이 가득한 글이지만 쓰면서 행복했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다정하면서도 웃긴 문장을 쓸 수 있었다.
나의 동화 스승님은 열 편을 쓰면 한 편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 번쩍 불이 켜졌다. 목표지향주의자의 전광판에 목표가 입력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좋은 동화 한 편은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전광판에 입력된 열 편은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