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를 지키는 일상의 알_S의 질문
에어컨의 등장으로 일 년 내내 얇고 두꺼운 스웨터를 입게 되었지만 그래도 역시 스웨터는 호빵처럼 찬바람과 세트이다.
관리를 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스웨터는 사실 나처럼 옷관리를 게으르게 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아이템이다. 비를 맞는 것을 좋아하고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고 빨래라는 것은 코트까지도 세탁기에 넣고 돌린 뒤 건조기에 말려버리는 나 같은 사람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매년 찬바람이 불면 F/W 상자에서 스웨터를 꺼내 눈썹칼로 하루 종일 보풀을 잘라낸다.(장바구니에 아주 오래 담겨있는 보풀 제거기가 너무 사고 싶지만 눈썹칼은 정말 성능이 좋다.) 그렇게 보풀을 제거한 스웨터는 조금씩 얇아지다가 결국 작별해야 한다.
재작년에 나는 애착 스웨터와 작별을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만 까먹고 말았다. 다른 해보다 찬바람이 조금 빨리 더 춥게 불어온 2025년 가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애착 스웨터를 찾다가 그것을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왜 버렸을까? 지금 입으면 딱일 텐데.
애착 스웨터와 나는 내가 서른 살쯤 운명처럼 만났다. 그날은 혜진언니 집에서 불사조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아현동에서 공부방을 하던 언니의 일터는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언니의 손길로 예쁘게 꾸며진 공간에서 우리는 언니가 해주는 다양한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취향이 가득 담긴 영화를 보며 놀았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별거 아닌 우리들끼리의 모임이지만 어쩐지 불사조 모임에 갈 때는 차려입게 된다. 잘 차려입고 이대역에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쌩! 해가 진 뒤 도시에서 불어대는 차가운 바람에 나는 속까지 덜덜 떨리게 추웠다.
본능적으로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뭐든 사서 입어야 했다. 옷사기 좋아하는 나에게 이런 이유는 정말 기분 좋은 핑계다. 이건 뭐 꼭 옷을 사야 하는 이유네. 계단을 올라가며 나는 언니네 집까지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보인 따뜻한 외투를 사겠어!라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불행히도(?) 제일 먼저 내 눈에 띈 것이 애착 스웨터였다. 쌩쌩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주변의 가벼운 니트 카디건들 사이에서 미동도 없이 무게를 잡고 있던 애착 스웨터는 커다랗고 얼룩덜룩했지만 어쩐지 몹시 따뜻해 보였다.
저거다. 나는 홀린 듯이 옷가게로 들어가 "저 스웨터 주세요!"라고 말했다. 스웨터를 걸치고 서있는 나를 보고 친구는 나 홀로 집에 2에 나오는 비둘기 아줌마 같다고 진심 어린 우정의 조언을 했지만 이미 나는 애착 스웨터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 뒤였다.
크고 무거운 그 스웨터는 땅으로 떨어지면 다시 주워 올리기 위해 잠에서 깨어야 하는 내 겨울 솜이불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애정 결핍으로 남자친구 없어 시기를 보내던 욕구불만의 날들에 살짝 다가온 백허그 같았다.
그러니 비둘기 아줌마의 이미지 따위는 이미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애착 스웨터는 아주 오랫동안 나의 겨울을 책임지는 아이템이 되어주었다.
나를 안아주던 스웨터는 내 품 속 아이까지 꽁꽁 포장해 바람 한 톨 닿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어딘지 외롭거나 쓸쓸한 날 애착 스웨터를 툭 걸치고 커피를 마시면 뒤에서 누군가 꼭 껴안아주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런 스웨터를 버렸다.
가벼운 오리털 패딩과 구스 패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옷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이번 주 날씨는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도 아직은 패딩을 입기로 타협하기엔 볕이 좋았다. 조금 얇지만 가벼워 보이는 또 다른 스웨터를 꺼내 입고 걷는 길에 결국 덜덜 떨었다. 그리고 애착 스웨터를 그리워했다.
단골 옷가게도, 인터넷 쇼핑몰도 온통 가볍고 따뜻한 패딩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애착 스웨터처럼 두껍고 무거운 스웨터를 찾고 있다. 역시 버리지 말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