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아직 살아 있을까.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비판하기 위해 하나의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든 병을 동시에 상자 안에 집어 넣는 실험이었다. 양자역학 이론대로라면 이 실험 속 고양이는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것이 된다. 그는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물리학자들이 고민하는 지점도 결국 어떠한 현상을 설명하는 언어의 한계에 있곤 했다. 또는 숫자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갈수록 더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하고 알 수 없는 공식들이 나열된다. 그래서 가장 쉬운 게 보게 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글을 읽어봤자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모든 것은 눈으로 봐야지만 그것이 살아있고 죽어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양자역학에 비판적이었던 아인슈타인은 그럼 달도 봐야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은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 것이다. 해나 달이 없으면 실제로 인간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식물도 자라지 못하고 먹을 것도 없고 살아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나 공식으로도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과학 물리학적 이론에 대한 관심이 크다. 진짜 이유는 슈뢰딩거와 같은 이름들 때문이다. 양자역학과 같은 단어에는 크게 이끌리지 않는다. 독일어는 한글로 옮겼을 때 매력적인 글자 중에 하나였다. 물리학 쪽으로는 아인슈타인 같은 이름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드높았기에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
옛날에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과 일본 축구 대표팀의 친선 경기에서 영어를 쓰는 캐스터가 일본 선수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야나기사와의 이름을 말했을 때는 그게 멋있게 들렸다.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킴, 리, 파크 또는 빠르크 등으로 불린다. 그쪽에서도 편하게 발음되는 성씨들이 흔해 또 색달랐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이름을 말할 때는 헤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이 없으면 사람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공이 있어서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빈 상자, 박스를 좋아하기도 한다. 고양이는 공간적인 감각이 우리보다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그들은 보는 것보다 몸으로 느끼는 것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산가리를 든 병을 그 안에 함께 집어넣다니 인간의 상상력은 참 무한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