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하게 사는 법을 가르쳤던 내 시대의 어른들은 잔인한 세상을 경험한 아이들이 훗날 고마워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소년에서 청소년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우리는 서로 경쟁해야 했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힘들었다는 것을 어른들은 잊어버린 듯했다. 경쟁을 체계화시켰고, 이길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거나 혼탁해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했던 건지 모른다. 우리가 배운 것은 흐리게 사는 것이었을까.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이 영화의 명대사 중 하나다. 선생이 아이들에게 큰 목소리로 따라 하라며 외치는 장면이다. 50년대에서, 그리고 또 70년대 80년대로 세월은 그렇게 흘러왔을 뿐이다. 얼마 전에 80년 대생들을 기득권이라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난 깜짝 놀랐다. 난 정말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벌써 기득권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나는 집을 소유하지도 도로의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의 덩치를 가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차라리 인도에 있기를 원하는 편이었다. 그것이 조금 더 좁고 지저분해도 아름답다 생각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1994년 서울, 영화 속 주인공은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산 여자인 듯했다. 그 아이는 소녀였고 난 소년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난 부산에 있었다. 갑갑하고 답답한 나날들을 보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런 그 아이의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나는데, 그 여자는 지금 시대로 돌아와 보면 페미니스트라 불릴만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다음 시대에는 그런 행색을 한 사람에게 사람들은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이 영웅이 된다. 내게 영웅은 누구였나. 내겐 현실적인 우상들만 몇몇 있었을 뿐인데 나보다 더 강하고 힘 센 사람들이었다. 왜냐면 한국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성을 동경하면 안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서는 서양인 음악가들, 조금 다르게 생긴 남자들을 따르곤 했다.
"날라리가 되면 안돼. 공부 열심히 해서 여대생이 돼야 돼."
엄마가 은희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아이가 정말 날라리이기를 포기하고, 그리고 여대생이 된다면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를 만든 건 결국 남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아빠였고 또 오빠들의 폭력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페미니스트가 될지 안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페미니즘은 학명 같은 것일 뿐이다. 공부 모임 같은 데서 사용되는 용어일 뿐이다. 남성과 여성의 몸에는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이 동시에 존재한다. 확률 또는 퍼센티지로 남성이 되고 여성이 되어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건 수시 60% 정시 40%와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경쟁일 뿐이다. 누군가는 수시로 누군가는 정시로 조금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되는 것일까.
가끔 남자들의 생각은 배제한 듯 여성들의 시각만으로 세상을 본 듯한 눈은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시선처럼도 느껴진다. 하지만 누군가는 조금 더 강하게 조금 더 기울어진 채로 이야기해야 했다. 엄마는 늘 그랬다. 힘이 약했고 그래서 더 날카롭고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곤 했다.
김보라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양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한국에서는 여성들의 그런 성취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건 남자들이 학교에서 싸움 잘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심리인데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난 이해가 부족하다 생각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을 무척 좋아했었다.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그 형을 나는 좋아했다. 그 형이 잘생기기까지 했다는 게 결정적이었다.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그 형을 보며 쓴웃음을 지어야 했던 건 내가 그 형보다 못생겨서였을까 아니면 형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많아서였을까. 이건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 간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자신에 대한 집착이 낳는 번뇌라고 볼 수 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보다 그들끼리 조금 더 친밀하고 끈끈한 스킨십을 나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였다. 남자들끼리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걷는 일에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누가 더 강한지를 느끼려는 듯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보편적인 행위였다. 어쩌면 양성애가 중요하고 이성애가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정이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한때는 우정이나 사랑이기도 했던 것 말이다.
왜 주인공 여자가 유독 예쁘고 피부가 하얀 사람이어야 했을까. 좀 못났고 피부가 검은 사람으로 캐스팅했으면 안 됐을까. 이 영화 역시 사회 기준적인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모든 생각들이 오해였기를 바란다. 영화를 끝까지 다 보지 못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색은 아닐 테지만 더 이상 이러한 색의 톤을 견디기 힘들었다. 내게는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였다.
벌새, 2018/ 김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