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이 아니었나.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덕수궁까지.. 부산에 살며 스무 살이 넘었을 때야 비로소 처음으로 한양을 느꼈는데, 근정전을 올려다보았을 때 목이 뒤로 꺽일 듯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창덕궁은 아름다웠다. 창경궁이라는 이름은 내겐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건 델리 스파이스의 노래 때문이다. 창경궁은 빛났고~가 아니라 천평궁은 빛났고였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흥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늦은 밤 숙소를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비가 쏟아졌고 우산 아래의 난 몇 명의 경찰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동그랗게 한 바퀴를 돌며 높은 담벼락의 미국 대사관저와 영국 대사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본다. 문득 드는 생각은 그랬다. 이 국가를 둘러싼 나라들은 도대체 몇이나 되었나. 고종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공사 중이라 안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불빛을 본 바퀴벌레처럼 지하철로 뛰어 내려갔다. 갑작스레 너무 많은 비가 쏟아졌다.
조선은 왜 그리도 많은 궁을 두어 나를 헷갈리게 한 건가. 발로 걷지 않으면 그것을 구분 짓는 일조차 힘들다. 그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을 여행할 때마다 궁이나 궁 주위를 걸을 때 신비로움을 느꼈다. 덕분에 더 많은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됐다. 가로로 긴 종묘는 독창적이었고 나는 언젠가 그것을 흑백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왜 그리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남겨두어 나를 감성에 젖게 하는 것인가.
아침에 비가 그치고 다시 돌담길을 걸을 때 몇몇의 덕수 초등학교 학생들을 봤다. 그들의 오늘 등굣길은 너무도 덥다. 그리고 출근하는 사람들. 마치 뉴욕처럼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과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회사원들. 우린 과연 동족이 맞는가. 나는 퇴근길이 아니었음에도 혼자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홍대에서 신사역으로. 신분당선을 타고 다시 새로운 세계로. 렘 콜하스의 생각을 읽기 위해 광교까지 갔다. 그 건물은 밤이 되어 빛을 낼 때 더욱 아름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