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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b Aug 22. 2022

바츨라프 강인지 블타바 광장인지


2011년 프라하로 여행을 갔을 때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바츨라프 광장은 어린 시절부터 사진으로 꽤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나는 '프라하의 봄' 이라는 이 다섯 자의 글자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낭만적인 일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프라하에 찾아온 봄.

여름의 끝자락에 프랑스를 잠시 떠나 체코로 가는 버스를 탔다. 메츠 휴게소와 독일의 어느 한 휴게소에 잠깐 들렀던 걸 빼면 열 몇시간을 창가에만 기대 있었다. 그나마 프랑스로 돌아올 때는 독일 국경에서 여권 검사한다고 버스에 올라 탄 독일 공무원들도 만나 봤지만 갈 때는 그런 것 조차 없었다. 

밤이 되고 수 많은 커다란 트럭들이 버스 옆을 스쳐갈 때는 이 곳이 라이네츠구텐닥 혹은 당케운트죄네 같은 게르만적 이름을 가진 고속도로인지 아니면 구미 경산 선산 청주 등의 글자들이 보이는 경부고속도로인지 그런 것 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 되어서야 체코어로 보이는 글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그리고 동이 트기 전 한 대의 트램이 버스 창 밖으로 지나가는 걸 목격했을 땐 그 트램 안 속에서 새벽 이른 시간부터 집을 나선 사람들의 건조한 얼굴이 눈 앞에서 흔들리며 스쳐 지났다. 

프라하였다. 고요한 아침을 맞은 도시의 풍경은 이제 파리가 아닌 프라하였다. 단 5일 밖에 되지 않는 여행이지만 어렸을 적 부터 가보고 싶었던 도시 중 한 곳에 십 몇년이 흐른 뒤에야 오게 되었으니 감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만 내려 놓고 나와 맞은 것은 체코 시민들의 열렬한 환대가 아닌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내 앞을 가로 막은 경찰차 한 대 였다. 

그들은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내가 5일 동안 프라하를 걸어 다니며 마주친 불량한 혹은 불량해 보이는, 아니 파리에서는 그 흔한 부랑자 한 명 조차 마주치지 못했는데, 아무튼 나는 그 때 무척 섭섭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경찰이 내 인적사항을 노트에 적어가고 나서는 다리에 힘이 빠지고 급격하게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힘없이 걷다 보니 블타바 강을 만났고 그 강변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잠에서 깨 눈을 떴을 땐 한 대의 배가 지나가고 있었고 배에 타 있던 어린 꼬마아이들이 내게 손을 막 흔들고 있었다. 꿈이었다. 그건 그냥 꿈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이들의 환한 미소를 보니 내 얼굴도 다시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의 열렬한 손짓이 환대처럼 여겨졌고 그리고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나는 다시 설레이는 마음으로 프라하를 걷기 시작했다.

바츨라프 광장이다. 이 길다랗게 뻗어 있는 광장이 사진 속에서나 봤던 바츨라프 광장이다. 사실 그 때 까지도 이름은 계속 헷갈렸다. 바츨라프 강인지 블타바 광장인지.

체코의 역사적인 현장에 두 발이 닿아 있다. 이 길다란 광장을 걷고 있다. 사진 속에서 봤던 탱크들이나 그 탱크들을 둘러싼 수 많은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허전한 기분도 든다. 낭만을 꿈꿨지만 낭만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눈으로 광장을 바라보고 있다. 프라하의 짧았던 봄이 지나간 바츨라프 광장은 다시 차가운 겨울을 맞은 듯 쓸쓸하기만 했다. 이래서 혼자하는 여행은 이제 그만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발머리를 한 여자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난다. 맥도날드 종업원 소녀들이 내가 날린 체코어 한마디에 주방에 모여 수근대며 웃는다.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아이스크림이나 빤다. 

'여행이 뭐 이런거지, 별 거 있나?'

사진이나 실컷 찍는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거리를 마음껏 누빈다. 연예인이 느끼는 자유가 이런 기분일까? 잠시 그런 착각도 해본다.

'혼자 노는 게 이런거지, 뭐 별 거 있나?'

프라하 거리 한복판에서 파리 한국슈퍼 에이스마트 종업원을 마주쳤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 반가웠다. 지나가는 경찰차에 다시 한 번 움찔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조용하다. 그리고 평화로운 도시다. 이 곳엔 소매치기도 담배 달라고 달라붙는 녀석들도 없다. 그리고 담배도 싸다. 그래서 환호한다.

맥주의 나라 답게 맥주 한 잔은 정말 분위기 있게 마실 수 있다. 경치 좋은 관광지들을 둘러 보고 그럼에도 이 곳에서는 허전함이 느껴져 어느 낮은 산에도 올라가본다. 기행이라면 기행이다. 그 곳 정상에서 선탠을 즐기고 있는 현지 주민들을 만난다.

프라하는 확실히 파리보다 복잡하지 않고 그래서 치명적인 매력도 조금 덜했다. 그래도 나름 재밌는 여행을 만끽했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프라하는 딱 그랬다. 그 곳에선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지독한 아름다움, 파리에서의 그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거리를 다시 걸어야 된다는 설레임과 불안함이 지금 내 머릿속을 다시 어지럽혔지만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고요했다.

프라하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다시 바츨라프 광장을 찾았다. 이른 오전 한산한 광장에 따가운 햇살이 비춘다. 그리고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그 치열했고 격렬했던 역사의 현장에서 봄의 향기를 맡는다. 뒤늦게 맞이한 프라하의 봄이었다. 늦은 여름에 마주한 따뜻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다시 안부를 묻는다. 지금도 평화로운지, 지금도 그 곳은 봄처럼 따뜻한지.


2016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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