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7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BNP PARIBAS나 LCL에 가서 계좌를 열었다. 파리에서 만난 유학생들이 프랑스 은행에 관한 정보를 전하며, 또 그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은 이곳에서 은행 업무를 보려면 정말로 큰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Ça dépend'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쓰고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들이 많이 쓰는 문장 중에 하나였다. 때에 따라 다르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 소리 나는 대로 쓰면 '싸데뻥'에 가깝기 때문에 영어 case by case처럼 줄여서 말할 필요는 없다. 계좌가 열리는 데에 보통 몇 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며칠 안에 열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면 지네들 꼴리는 대로였다.
그때 난 미테랑 도서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고 근처에 LCL 은행 지점이 하나 있었다. 오며 가며 보다 어느 날은 문 앞에 섰다. 그러다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구가 있고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다 차례가 되면 당당한 듯 걸어가 은행 직원과 마주하는 그런 시스템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를 어떤 방으로 안내했는데 꼭 '본 아이덴티티'의 맷 데이먼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비밀스러운 업무를 보러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내게 특별한 업무를 본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하지만 내가 하려던 것은 단지 계좌 개설일 뿐이었다.
비밀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심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신속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우리나라 은행 직원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그런 사회 시스템이 사람들의 심리적 여유를 빼앗아가지는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은행을 나왔을 때 내 손에는 쥐어져 있는 것이 없었다. 통장이나 계좌번호를 받지 못했다. 빈손으로 나왔다. 업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결국 난 며칠도 기다리지 못하고 외환은행으로 가 계좌를 개설했다. 그곳은 한국인 직원들이 한국인 여행자들과 유학생, 이민자들을 맞이해주는 곳이었다.
외환은행에서 업무를 볼 때는 더 많은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문화에 융화되면서도 사회 시스템을 따라가지는 못했던 난 한국이었기에 그랬던 걸까. 난 한국인으로 설계되어 그런 식으로 작동했던 걸까.
몇 유로의 수수료도 아깝지 않게 생각해 한국인 직원으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일도 있었다. 외환은행에 가면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곳은 내게 특별한 곳이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은행에 자주 오지 말라고 혼내는 곳이 있다면 아마도 파리 외환은행이 유일할 것이다.
그곳은 명품 매장들이 가득한 Alma Marceau 역 근처에 있었는데 은행이 있는 건물 1층에는 발렌티노 매장이 있었다. 돈을 뽑고 나오며, 줄어가는 잔고를 확인하며 드는 생각은 어딘가에 걸터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옆 건물 계단에 앉아 발렌티노 매장 안에 전시된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을 보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유리에 반사돼 내 모습도 함께 찍혔다. 그녀를 곁에 두기에는 초라한 모습 같아 보였다.
나중에는 외환은행이 위치를 옮겨 이사를 했는데 그곳도 상젤리제 대로변이었고 명품 매장들이 가득한 곳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등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니트 한 벌을 입은 채로 차가운 유럽의 겨울 날씨를 감당해야 했던 제이슨 본처럼, 때로 난 본 아이덴티티의 맷 데이먼에 나를 교차시키기도 했다. 그때 난 그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어느 날은 영화 속 제이슨 본의 집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프랑스로 오기 전 제이슨은 취리히 은행에 들러 자신의 돈과 소지품을 찾게 된다. 그곳에서 여권 속 자신의 신분, identity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아무튼 그 여권에 기록되어 있는 주소를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104 Rue des Jardins, Paris. 거기서 영상을 멈췄다. 여권 속 주소를 머릿속에 입력시켰다. 너무도 간단하게 해결된 문제였다. 다음날 그 주소지 앞에 도착해 그곳이 고등학교 운동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Saint-Paul역 근처였고, 역에서 걸어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곳은 고등학생 아이들이 축구공을 차며 흙먼지를 날리는 곳이었다. 더그 라이만 감독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고등학교가 있는 골목길은 꽤 아름답다. Le Village Saint-Paul로 알려진 곳이 그 길과 바로 연결돼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허탈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단서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영화를 보며 그 장면 앞에 머물렀다. 사실 제이슨의 집은 너무도 흔한 파리 아파트의 모습이어서 그것만으로는 위치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영상이 흘러가도록 그대로 놔두었다. 마리가 계단에서 구토를 하고 난 뒤, 그리고 본의 부축을 받은 채 건물을 뛰쳐나와 함께 달아나는 그 장면에서 새로운 단서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다시 화면을 멈췄다.
반대편 건물 1층에 중국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간판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봤다. 그 번호를 구글에서 검색해 찾아냈다. 그곳은 트로카데로 광장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었다. 에펠 탑을 등진 채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사진 찍는 곳. 트로카데로 광장 길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였다.
아파트 앞에 서서 여기가 제이슨의 집이구나 하다 출입문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 장면이 인상 깊었다. 취리히로 가기 위해 TGV를 탄 제이슨이 창문에 비친 자신의 흐릿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 모습이 말이다.
TGV를 탄 내가 루앙에서 파리로 돌아가던 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여행자들의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마주친 자신의 본 모습.
"What the hell are you doing? Where am I?"
제이슨 본의 첫 대사였다. 모든 여행자들의 공통적인 물음이었을지 모른다. 도대체 넌 뭐하고 있는 거야?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그 영화를 읽어야만 했다. 완전하게 해석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