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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 Apr 30. 2023

'리틀 드러머 걸'



"그들은 같은 길을 두 번 타지 않죠."


'그대 그리고 나'가 내 인생 드라마였다면, 최근 본 가장 재밌는 드라마는 '리틀 드러머 걸'이었다. 존 르 까레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 연출을 맡은 건 영화감독 박찬욱이었다.



그 드라마에서는 그런 대사가 나온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그렇다. 그들은 언제나 창조적으로 움직이며 그래서 마이클 섀넌, 마티는 칼릴은 모차르트에 비유하기도 했다. 폭발물에 혼을 싣는가, 또는 그들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일까. 내겐 그저 분노하고 또 분노해, 그러다 지쳐 세상 모든 허무함을 다 끌어안은 인물처럼 보였다. 샤리프 가타스, 칼릴은. 

그의 동생 미셸은 여자를 좋아하는 철없는 녀석이었고, 그러다 잡혀 형을 점점 궁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 형도 결국 여자에 유혹당해 인생의 끝으로 향하지만. 엔딩에서는 그러나 그 모든 사건의 연출은 감독 본인이 한 것처럼 말한다. 마티가, 혹은 그런 남자가.

이스라엘은 때로 그런 국가처럼 여겨진다. 무시무시한 복수가이자 은밀하고도 위대한 연출자인 듯, 그들은 천재들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도 했으며 그래서 아랍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모두 천재적인 능력들을 지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하늘이 내린, 그 어느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능력들을 가졌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칼릴이라는 캐릭터에 푹 빠져 오랜 시간 동안 그에 대해 생각할지도 모른다. 드라마의 전면에 내세워지는 건 찰리, 플로렌스 퓨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가디이지만. 드라마의 처음은 칼릴이 폭탄을 제조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오직 그의 팔과 다리만을 보여주며 나중에 그의 얼굴과 눈이 부각되도록 한다. 그 눈빛을 지울 수 없다.

어릴 때는 MBC나 KBS 같은 방송사에서 하는 드라마들을 많이 봤는데, 지금은 넷플릭스 드라마가 대세다. 리틀 드러머 걸은 BBC 드라마였지만 왓챠에서도 서비스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러한 사이트를 처음 이용해 봤다. 오직 그 드라마 하나 보려고 말이다. 덕분에 방영 시간에 맞춰 TV 앞에 앉게 되는 드라마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됐다. 이젠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때, 하지만 그땐 연출자가 누구인지 그런 것에 관심 없었다. 지금은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스토리에 끌려가고 배우들의 모습과 연기에 홀리기 때문이다.

마티는 그 모든 일을 치밀하게 기획한다. 찰리가 미셸을 만나는 허구를 만들고, 나중에는 칼릴을 만나게 되는 그 모든 우연을 꾸민다. 칼릴의 누나라는 마지막 관문까지 통과시킨 뒤 다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스라엘인들은 극의 클라이막스가 될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이미 영국 땅에 도착해있었다. 물론 영국 군사정보국의 우두머리 쯤으로 나오는 찰스 댄스가 마지막으로 그들을 한 번 압박하지만 말이다. MI6는 나오지 않았다. 그 정도면 영국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은 건드리지 않고 잘 만들었다 생각한다. 모사드는 그런 기관이었다. 그 천재적인 테러리스트들을 상대하기 위해 누구보다 집요해져야 했던.


"칼릴은 꼭 모차르트 같아요. 그 독일인처럼 말이에요."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인입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마 유대인과 아랍인을 보면 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잘 모를 수도 있듯, 그들은 그렇게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여왔다.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고 있는데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유럽의 땅에서 살며, 또 더 먼 땅으로 이동해 존재하며 그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마이클 섀넌이,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그리고 시모나 브라운 같은 배우가 유대인 역할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여전히 플로렌스 퓨 같은 배우가 앞에 서야 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비록 그 배우가 압도적인 미모를 가진 배우는 아니지만, 샤를리즈 테론처럼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여배우는 아니어도 서양인이라는 존재감은 있어야 한다. 박찬욱 감독은 지금 미국 드라마 '동조자'를 준비 중이다. 베트남계 미국인을 앞에 내세워, 그러나 여전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뒤에 있어야만 하는 세상이다. 그것을 부정하기 싫다. 그러다 결국 그 이스라엘 정보국 사람들처럼 될지 모르니 말이다. 천재들을 잡는, 악의 무리들을 없애고 없애 감정이 닳은 인간처럼 될지도 모르니.

그래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꽤 이국적인 외모라는 소리를 듣는 유대계의 미국인이라고 한다. 세상은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과격한 짓을 하는 테러리스트들이 존재해도 아주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다. 한국인도 영국 드라마를 찍고 미국 드라마를 찍는. 큰 변화란 어쩌면 매우 작은 걸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모른다. 한 시간, 일 분, 일 초,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아니, 그냥 그런 숫자들을 보는 게 일이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12시 20분에 폭탄이 터지도록 할까, 12시 25분으로 맞추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리틀 드러머 걸, 2018/ 박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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