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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 May 25. 2023

나는 그때 TGV를 타고..



"국장님께서는 이러한 트집이 혹여 진실일 가능성을 알고자 하십니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다. 니쿠아나 움보시를 제거하는 임무에 실패하고, 그렇게 제이슨 본은 기억을 잃은 채 유럽 땅을 떠돈다. 그건 움보시의 트집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건이었다. 국장도 모르는 CIA의 어두운 그림자가 늦은 밤 그의 배 위로 드리워졌다. 

첩보 영화 스파이물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 나는 언젠가 국정원장이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런 기관의 수장이면서도 밑에 부하들에 속고 있으면 어쩔까 염려한 적도 있다.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비밀스러워야 하고 그렇게 옆에 앉은 동료가 하는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다. 하물며 우두머리는 어떨까 생각들었던 것이다. 모두 누군가에게서 전해 듣는 이야기들 뿐일 텐데, 내가 나타나면 그들이 힘들어하고 불편해할 것이 뻔한데. 그저 선택을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또 일어나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을 확률은 높지 않다. 우리 국장님이 내일은 어떤 명령을 내리실까를 부하들이 궁금해하듯, 그들은 그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듯 손과 발이 하는 일은 머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머릿속 생각들을 이해하지 못한 손과 발은 또 이상한 일들을 저지르기 마련이었다.

1979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역시 박정희 모르게 아랫놈들이 제거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나돈 적이 있다. 그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기에 이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 됐다. 파리 근교의 한 양계장 닭모이 분쇄기에 들어갔다는 소리도 있을 만큼 자극적인 이야기들만 낳을 뿐이다. 어쩌면 더 잔인하게 살해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그리고 난 그것을 사실처럼 믿은 적도 있기에 그런 소문을 부정하지 않는다. 당시 임무에 관여했다는 자가 나타나 그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꿈 속 일이 아닌, 그 모든 사건은 현실에서 꾸며지고 기획된 하나의 시나리오와 같은 것이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집필하게 되었느냐가 분명하지 않을 뿐, 작가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역시 자신이 어쩌다 그런 스토리를 쓰게 되었는지를 몰라 그 모든 일은 미스터리와 같다. 하지만 추적하고 쫓다 보면 실체를 알게 된다. 모든 진실은 끝에 있어 끝까지 가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마주하고는 부정하려 할 뿐,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려다 스스로 낭떠러지 앞에 서게 되는 운명일 뿐. 그러는 사이 지나온 길에 펼쳐졌던 그 모든 실제 했던 일들은 필름 속 기억들처럼 사라지곤 했다. 나는 그게 영화의 가치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모든 감정들을 잊지 않게 하는 힘이 영화를 통해 작용한다 믿는다.

제이슨 본은 프랑스어로 독일어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과 독일 사람들은 아마 넌 그냥 미국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누가 들어도 미국인처럼 발음하고 말했기에 그랬다. 그러나 맷 데이먼은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피를 물려받았을 확률이 높다. 그건 명백히도 그렇다. 이젠 그게 중요하지 않은 일일뿐, 어쩌다 그렇게 된 일을 더는 캐묻고 따질 이유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 세상 모든 정보국이 하는 일이 그런 것 같다. 굳이 그걸 따지고 들어야만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나는 애국심으로 이 국가에 헌신하듯 곧 헌신짝이 될 운명인데도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다. 삶은 꼭 영화와 같기 때문에.. 

내 글은 항상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른다. 할 이야기가 없으면 영화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일 없으면 영화나 보고. 어제 그런 꿈을 꿔서,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를 장면들이 머릿속에 머무르다 간 이유 때문에..

꿈을 꾸면 그 장면들이 선명하지 않다. 꿈속 인물들이 비교적 또렷이 그려질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해석이 중요하다 믿을 뿐, 내가 그런 놀이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영화적 혹은 소설적 상상을 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떠올리려 한다. 내 마지막 타깃은 언제나 연출자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썼는지,그리고 만들었는지 끝까지 그를 쫓으려 한다. 내 꿈속 연출자를 말이다. 어쩌면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를.


The Bourne Identity,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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