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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b Nov 22. 2023

'The Snowman'

https://youtu.be/c44kam_8N3I?si=kKpQZR3gb9o5bi1Y


좋은 소리는 인간의 상처를 치료해준다. 별로 좋은 소리 같지 않지만 그런 소리들에 치유되고 병이 낫고는 한다. 그건 참 웃긴 이야기이다. 그가 고르는 음악들은 늘 웃기거나 이상하지만 큰 감동을 주니. 그가 추구하는 아이러니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영화였다. 그런 재미를 알면 또 다르게 다가올 영화일지 모른다.

한 소년이 엄마를 잃으며 시작되는 이야기. 충분히 연상할 수 있는 범인의 어릴 적 모습이다. 부모로부터 버림 받듯 홀로 남겨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비극이 그려진다. 이 시퀀스에서 오래전 모델의 볼보가 등장하는데 시간이 지나 새로운 모델의 볼보가 하얀 땅을 달린다. 그런 식으로 상처받은 사람은 그런 식으로 되갚으려 한다. 이 영화에서 볼보는 소년 트라우마의 성장을 표시한다. 극 중 첫 번째 범행 대상은 테슬라를 타고 나타난다. 그 차는 띠리링 소리를 내며 출발하는데 뒤에서 겔겔거리는 볼보의 시동걸림이 웃음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더 이상 무성이지 않고 음악이 또 사운드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이 스웨덴인 감독의 능력이라 할 수 있는 건 바로 소리를 잘 쓴다는 것. 선곡 실력 역시 탁월하다. 좋은 음악을 좋은 소리를 찾는다기 보다 필요한 소리를 잘 찾아낸다는 것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를 맴돌고는 한다. 그의 코 고는 소리와 함께 타이틀이 시작된다. 술에 취해 오두막에서 잠든 그런 해리의 모습을 보며 꼬마아이 하나가 비명을 지르고 가는 건 덤. 민망했는지 굳이 애 엄마들에 뜬금 없는 헬로우를 시전하고 그런 해리 뒤에서 여자들이 숙덕거리는 것도 덤. 그러면서도 이 시퀀스는 슬픔을 나타낸다. '설국열차'의 음악감독 마르코 벨트라미가 만든 선율이 빛을 발한다. 또 영화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눈이 올 때마다 여자가 살해됐죠"(정확하지는 않지만)

여담이라면 여담이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토마스 알프레드손과 합을 맞춘 촬영감독을 데려와 '인터스텔라'를 찍는 등 그들의 관계도는 복잡하다. 해리와 라켈의 관계 역시 그렇다. 올레그라는 아들을 둔 사이이지만 부부는 아니고 그렇다고 안 만나는 사이도 아닌. 라켈, 샤를로뜨 갱스부르가 이 영화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페미니즘하면 떠오르는 도시 파리에서 나고 자란 배우가 라켈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것도 아주 영향력 있는. 해리는 끝까지 라켈에 종속돼있고 그런 그들 사이를 비웃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범인은 해리가 눈사람을 보도록 한다. 해리는 실종된 여성의 딸에게 그렇게 묻는다. 

"왜 눈사람이 집을 향하도록 만들었지?"(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는 그 어린아이에게 심문을 한다. 아주 친절하고 멋있게. 아이는 눈동자가 흔들리며 정보가 될 만한 것들을 푼다. 이렇게 말하면 잔인하다 할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대화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 그림들 누가 다 그린거야, 전화기는 엄마가 사줬어 등등의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싱긋 웃고 떠난다. 마이클 패스벤더가 말이다.

곧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고, 범인을 쫓는 해리의 발걸음은 점점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오슬로 동계올림픽이라는 소재가 이 싸움을 하나의 시합으로 보게끔 분위기를 만든다. 발 킬머가 산 정상에서 권총 한 발을 쏘고. 라프토, 그는 카트린의 아빠였자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형사였다. 그가 해리를 닮았나. 감독이 그렇게 묻는 듯했다. 카트린은 왜 계속 해리의 주위를 맴도는지.

모두 노르웨이 형사계(강력계?)에서 전설적인 존재였고 주정뱅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같은 사건을 다루고 같은 범인을 상대하게 된다. 그 사건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게임이기도 했던 것이다. 4년마다 개최되는 축제는 아닐지라도.

영화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어느새 난 범인이 누구인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 내가 느끼고 싶은 건 남녀 관계의 슬픔이었고 가족이라는 연의 잔혹함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가 만든 장면들은 계속 내 감정을 건드린다. 그가 만든 영화를 계속 보게 되는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디테일이나 사소한 것들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단지 그걸 느낄 수 있다면 행운인 것이다. 언제나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작은 것을 봤다. 지금 세상을 살며 이상하다 생각되는 건 작은 것들만 보고 큰 것들을 놓치려 한다는 것. 영화는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스릴러가 그토록 진화해왔기에 관객들은 새로운 걸 찾게 된 걸까. 나는 이 영화야말로 새롭고 참신한 것이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술을 먹으면 길에서 자곤 했던 내 20대의 버릇을 추억하게 해 감동하기도 했다. 떡실신한 해리의 몸, 발을 축구공 차듯 툭 차고 가는 낯선 여자의 부츠가 왜 그리도 웃겼던지. 

곧 범인의 실체가 밝혀지지만 내겐 끝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해리는 왜 라켈이 소리를 지르자 뛰어가고 그와 싸움을 벌이는지 그게 더 우스웠다. 이런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이 한국 영화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생각하는 건 그런 표현을 할 때 라켈에 입혔던 옷이 '바람난 가족' 문소리가 입었던 의상과 비슷했고 밑에 깔린 해리의 모습, 형태가 그 영화 속 봉태규의 모습, 그것과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그 스웨덴인 감독을 좋아한다. 한국이나 스웨덴이나 모두 압도적으로 강한 국가는 아니지만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할 힘을 가진 국가들이다. 영화를 감상하는 건 하나의 치료 방법이다. 의사에게 배우는 심정으로 나는 이 영화를 분석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럴 마음 없었다. 나는 사는 게 늘 슬프다는 생각이었고 더 지치고 힘들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누가 영화를 리뷰를 쓰기 위해 보나. 새로운 영화를 보고 싶어도 자꾸 연출의도를 읽게 돼 요즘은 보지 못한다. 더 이상 내게 하얀 눈 밭이란 없는 것 같다. 하얀 여백을 마구마구 더럽히고 싶은 마음 같다. 나는 해리를 보며, 또 이 영화를 보며 많이 슬펐고 아빠가 욕실에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엄마 잃은 애의 말이 한편으로 너무 웃기기도 했다.


The Snowman, 2017/ Tomas Alfre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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