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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b Mar 08. 2024

파리가 내 몸에


내가 파리에 있었을 때 나는 파리 몸 속 빈곤한 세포였다. 그중에서도 같은 혈통의 무리를 만난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들 사이에서는 언어가 통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난 연길에서 온 동포 가족을 만나게 된다. 

그 집에서 몇 개월을 머물었다. 한국에서 '황해'라는 영화가 개봉하고 크게 주목을 받을 때였다. 물론 파리 거리에도 곳곳에 그 영화 포스터가 붙어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도 먹고 살만해졌고 더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직감했다. 아저씨와 난 저녁마다 고기를 먹으며 보드카를 마셨다. 아저씨의 아내는 함께 앉아 우리 이야기를 듣거나 아이를 돌보거나 했다. 그 아이는 이제 초등학생 쯤 되었을 텐데 나보다 훨씬 프랑스어를 잘할 것이다. 나는 유치원생 수준도 되지 않았으니. 아저씨의 조카는 작은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하지만 구남은 자신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황해를 건넌 것이기도 했다. 나는 꿈을 찾아 떠났다. 어쩌면 도망이기도 했던 그 비행은 큰 땅들을 지나 서쪽 유럽에서 멈췄다. 구남에게 쥐어지는 돈 경비가 마치 내 손에 쥐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던 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배우가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나오며 후랑크소시지를 먹던 장면 역시 말이다. 돈이 있으면 어떻게든 먹고 보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줄어드는 경비에 죄의식마저 느끼지 않았던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산속에서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쥐며 흐느끼던 그 모습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내가 왜 이곳에서.

그럼에도 화려한 나날들을 보내기도 한다. 마치 영화배우가 된 듯한 순간들도 있었던 것이다. 멋진 카페 멋진 레스토랑에서 그 분위기를 즐기던. 그런데 왜 그리도 족발이 먹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중국인들이 정착한 동네에 가는 것이 그땐 내겐 일상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서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 옛날 조선은 청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바라보았던가. 내게는 하나의 품이었으며 떠나지 못할 거리였음을.

중국 땅에 자리 잡은 우리 민족 사람들은 더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음을. 아저씨는 젊은 시절 부산에도 있었고 제주도에도 있었다며 그곳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제주도에서 대학을 다녔던 내게 특별한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거리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제원사거리라고 했다. 그리고 우린 웃었다.

그곳은 신제주의 번화한 거리였는데 학교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면 늘 그곳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인지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아저씨는 부산 덕천동의 어느 병원 이름을 이야기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항상 광고로 듣던 그 병원의 이름을.

다시 먼 비행을 떠나던 내게 아줌마는 아침 약밥을 건네며 배를 채우라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었는데, 호일과 비닐에 담긴 그 음식을 손에 쥐며 왜 슬픈 마음이 들었던 건지.

아저씨의 누이는 저녁 늦게 일을 마치고 들어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셨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었으니.

새벽 출근길에 오른 그에게 인사를 했다. 거실에서 자다 반쯤 일어나 다녀오세요 인사했다. 그래~ 그리고 돌아서던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저씨의 조카는 결혼해 아이를 낳은 것 같았다. 어렴풋한 기억처럼 새로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결국은 그리 될 것이라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과 난 지난 이야기처럼 선명한 추억들을 만들어내게 될까. 어느덧 난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살기 바빠졌다. 그때의 파리처럼 이 도시의 거리도 낭만적이며 때론 고통스럽도록 혼잡하다. 멋진 카페들을 원했고 더 멋진 사람들을 마주하기를 원했던 그때를. 4시간이면 서울로 갈 수 있다. 땅과 바다를 건널 필요도 없는 듯 꿈꾸지 않는다. 런던으로 가겠다던 그 큰 바람이 휑한 바람처럼 그냥 스치고 지날 듯하다. 런던의 분위기는 인터넷 세상에 널렀으며 이 거리에 영어로 된 간판 역시 수두룩하니 말이다. 그 집에 들어간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잊지 못할 듯하다. 허무하게도 남는 것은 그런 사소한 추억들 뿐이었으니.


https://youtu.be/w5782PQO5is?si=VpdJlx0_wQrKjj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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