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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 Sep 14. 2024

'La Mer'


팅커, 테일러, 솔저, 그리고 스파이. 푸어맨은 그냥 불쌍한 놈 정도로 여기고 대충 넘어간다. 

팅커 테일러 솔저... 는 첩자를 가려낸 뒤 지목해야 할 일종의 코드명이었다. 컨트롤이 짐 프리도에게 부탁한 일이다. 신중을 기해달라면서.

이 영화는 존 르 까레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영국 MI6에서 실제 벌어졌던 일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킴 필비라는 자가 있었다.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방으로 불리던 멤버 중 한 명으로 영국과 소련 사이에 걸쳐 있었던 인물이다. 영국 정보부에서 활동하며 기밀들을 소련으로 빼돌렸고 훗날 소련으로 망명해 영웅 대접 받았다고 한다. 말년을 술에 절어 살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 영화를 보고 난 정보를 찾고 빼앗는 일이 일상적이라는 걸 알았다. 우리 평범한 삶을 잘 표현했다 느낀 것이었다.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는 스파이의 모습을 그린 게 아니라 스파이가 되어야만 했던 자들을 그린.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들이 잘 잊히지 않는 이유다. 그때 난 왜 그렇게 술을 마시고 만신창이가 됐나 하며 그런 기억도 떠올린다. 눈물 흘린 날도 있었다. 날 배신하고 돌아선 자의 등을 보며 허무함도 느낀다. 나도 그렇지 않았던가. 참고로 코드명 테일러는 콜린 퍼스가 연기한 빌 헤이든이었다.

그들 중 스파이는 누구였을까. 이미 혼탁해진 세상에서 진짜 가짜를 구분짓는 일은 이제 무척 어려워졌다. 누가 정의로웠으며 또 누가 비열했는가 하는 질문조차 어리석게 여겨진다. 그래도, 그런데 진짜 스파이는 누구였을까.



어느 날 한 조직에 몸담게 되며 점차 그곳에 자리 잡는다. 오늘 같이 일한 당신의 직장 동료 또한 그렇다. 그 또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하며. 그 싸움이란 참 쉽지 않다. 어느 날은 가슴에 멍이 들고 또 멍이 들도록 하며. 때론 아주 날카로운 것이 서로의 심장을 조준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난 바람직한 일처럼 보인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떠나는 건 자신의 삶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모두 그러니 그러는 게 아니라면. 또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게 있어 찾아 떠나는 것이라면 그 열정을 지지하고만 싶다. 그런데 결국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섞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한 직장에서 그만두지 않고 오래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인내심이 강하길래 그런 걸까. 

시대가 바뀌며 개개인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 규칙 규율이 무너지기도 하는데.  

똑같이 10년을 일하고 20년을 일한다면 모두 같아야 했다. 하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자는 같을 수 없었다. 이젠 이 일을 놓칠 수 없지만, 그러나 삶의 불안한 나날들이 언제나 자신을 흔드는데. 1년을 일하고 그만두면 퇴직금을 고작 한 달 월급 정도만 받게 되니, 그러면 그는 왜 그들보다 더 미친 듯이 일해야 했던 거지?

내가 영국 정보부에 몸담은 채로 소련을 위해 일한다면 언젠가 그곳에서 영웅 대접 받을 것이다. 모스크바에 멋진 집 한 채를 얻고 먹을 것과 마실 것, 또 입을 것들을 충분히 제공받을 것이다. 왜 배신자가 되지 못하는 거지? 가끔 그런 생각도 하는데. 잘 먹고 잘 사는 게 소원이었다면서 말이다.

킴 필비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스파이가 된 걸까. 빌 헤이든은 왜 짐 프리도를 배신하면서까지 적이 되어야만 했던지. 정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그랬던 걸까. 



진짜 내 꿈은 잘 먹는 것도 잘 사는 것도 아니었다. 꼭 그를 알 것만 같다. 내 꿈은 별이 되는 것이었다.

매달 지급되는 월급이란 그저 기적적인 일처럼. 그 금액이 얼마였든 크게 상관도 하지 않을 듯. 일해 번 돈으로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먹으니. 또는 어두운 술집 한 구석에 몸을 기대어 놓으니. 

조직은 어느 곳이나 수장이 있고 보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어떤 싸움을 벌이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 보지 않으려 눈을 감는 사람들이. 가장 원망스러운 자들이다. 그를 원망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란 정해진 만큼 일하며 쉬고 돈 받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 원하는 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빌 헤이든은 그렇게 말한다. 서방은 이제 추하다고. 썩을대로 썩었다고. 

내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거나 대통령에 한마디 건의도 할 수 없는 위치라면 가장 현명한 방법은 스파이가 되는 길일지 모른다. 그 길을 가는 일이 가장 나을지도 모른다. 이 나라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들이 날 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런데 난 대통령도 총리도 심지어 재무장관도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가 아는. 저 파란 하늘의 검은 별처럼. 그런 빛이 우리 곁에 머물렀다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진짜 스파이는 조지 스마일리라고 말하는 듯했다. 난 동의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첩자, 스파이였다.

난 보스를 위해 수장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믿고 따르지 않는다. 단지 내겐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난 그런 리더를 만나고 싶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리더. 또는 아무 조건 없이 내 곁에 있어주던 사람들. 그들마저 언제든 배신할 수 있지만, 그게 진짜 내 운명 같다 여기지만.

팅커 테일러 솔저... 그들이 모조리 다 스파이였다면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결말이 있을까. 



이 영화는 첩보 영화를 통해 기대할 만한 스펙터클한 장면 또는 기가 막힌 반전 같은 것이 없지만 내겐 가장 충격적인 영화 중 하나로 남았다. 맞다. 그게 진실이지 않았던가. 정의로롭기만한 사람은 없고 정의만을 추구해서는 살 수 없었다. 오늘 하루도 낮이 있고 밤이 있었듯 삶은 늘 명암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이 하루를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이기를.

그래도 그런 영화를 볼 수 있어 좋았다고. 



바다, 그리고 여름의 하늘. 그 가사는 너무 아름답다. 우연스럽게도 그 뜻을 알아 난 이 영화 엔딩 음악을 더 좋아했고 사랑하게 됐다.


https://youtu.be/Fcb3LdCfMKY?si=ZD3KO5gCDN7D3c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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