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밤 갑작스레 방 불이 켜지고 유지신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날 깨운다. 바깥에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으며 라 부장이 큰 목청으로 인사했고 그건 쇠기둥과 같은 충성심이 담긴 목소리였음을.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라 부장 어깨너머로 한 남자가 보였다. 누군가 한 명이 서 있다. 그 몸은 점점 커져 다가오고 난 그가 김영철 동지라는 것을 안다.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은 채로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에는.
그는 날 식탁에 앉게 했고, 방문을 열고 나온 난 마치 고문을 짐작한 듯 그를 마주 보고 앉는데.그의 수하들은 모두 퇴장하고 그곳엔 정적만이 흐른다.
의자에 앉은 그가 옆으로 몸을 돌린 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소."
그리고 시선 떨어트린다. 그는 저 벽 어딘가를 보고 있었는데.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온 목적이 무엇이오?"
그때야 내 눈을 마주치고, 그러나 그 안경 위 벽에 걸린 액자 모습이 드리워 그 눈빛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날 여기로 끌고 온 건 당신들이었던걸. 이끌리듯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게 나라면 난 그 말을 믿을 수 없을 테다. 아니, 믿지 않을 것이다. 내겐 이 국가에 대한 어떤 희망도 미련조차 없었음을.
그에게 난 대답한다. 그게 작전이라면 작전명은 우연이 어울릴 것이라고.
"전 계획한 적이 없습니다."
날 세뇌한 건 당신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왜 그 몸을 마취까지 해가며 붙들어 두었던가.
"돌아가고 싶소? 아니면, 이곳에 머물고 싶으신지요."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그 열망을 더는 알 수 없음을. 그게 누구의 것인지도.
"마지막으로 묻겠소. 그렇다면 당신이 영화감독이 된 이유는 무엇이오?"
난 영화감독이 될 계획을 꾸미지 않았음을. 꿈을 꿨을 뿐이다. 머나먼 세계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을 뿐, 그 소리가 내게 다가옴을 알아차릴 따름이었다.
그가 들고 서 있던, 그러나 도로 가져가지 않은 책 한 권이 식탁 위에 놓였다.
"모스크바에 가면 당신을 기다리는 동무가 있을 겁니다. 그곳으로 가면 짐작할 수 있겠소? 목적이든 이유든. 당신이 왜 이곳으로 온 것인지.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말이요."
시선이 멀어지고 그의 얼굴, 그 머리가 내 망막에 부딪힐 듯 당겨져 왔다.
"우리가 왜 서로를 동지라 불렀는지 잊지 마십시오.“
그곳에서 이 책의 러시아어 판을 찾으라 말한다. 그 책 얼굴 껍질을 본다. 붙잡을 수 없는 존재처럼 사라지던 그는 결국 그리 떠난다.
등 뒤 방 문을 열었을 때 거긴 라 부장이 있었고 그의 얼굴 살가죽은 굳어있었다. 늦은 밤 찾아온 손님의 방문이 그들을 영영 잠들지 못하게 할 듯하다. 난 목이 말랐음에도 술을 찾는다.
"술 한 잔 할래요?"
내가 술을 권해도 그는 그 잔을 외면할 테지만. 난 그것에 취해있고는 했다. 그와 난 다르지만 서로 닮았다.
창문 밖 나무 보는 걸 그는 좋아했다. 내 눈은 그 풍경을 감상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았지만. 난 그런 아이가 아니었으니.
그 아이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그렇게 그들 행동을 분석하던 게 내 학교 점심시간 일상이었던걸. 그런 내가 그런 이야기를 그런 영화를 꾸밀 줄 그때 친구들은, 또 선생들은 아마 짐작지 못했을 테다.
라 부장에게 난 말했다. 중학생 때 신문에서 그런 기사를 읽은 적 있다고.
"서해에서 한 중학생이 실종됐다."
어떤 아이는 땅 위에 있다 물이 밀려와, 자기 키보다도 높이 차오른 물에 서서히 그 몸이 잠기고.
내가 열다섯 살에 읽은 신문기사, 서해에서 사라진 한 중학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친구들과 그를 가르쳤을 선생들은 그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없는 아이 될 줄 알았을까.
라 부장은 그걸 손에 쥔 채 놓지 못하고. 그 잔 속에는 술이 아닌 커피가 머물렀다.
"그때 선생님이 우리한테 말했죠. 방학이 돼도 바다에는 가지 말라고."
그 아이는 여전히 깊은 물에 빠져 죽은 아이로 기억될지. 그들 부모는 아직 마음 한구석이 구멍 난 채로 살고 있을지.
그날 난 그곳에서 돌아갈 희망 잃은 자의 얼굴을 봤다.
라 부장은 술이 아닌 커피 한 잔을 권했고 내 잔 속에도 그게 머무른다. 그랬다. 담배의 애인은 원래 커피이지 않았던가. 그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별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음을.
그때 당신은 정녕 할 말이 없었던가. 곧 누가 날 데리러 올 텐데 말이다. 전해줄 이야기가 정말 없는 것이었나.
동이 틀 때까지 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이었다. 날 모스크바로 데려갈 자들이 도착하고 난 그곳을 떠난다. 그게 라 부장과 함께한 마지막 자리였다.
차 창문 바깥으로 그 집을 본다. 라 부장과 난 같은 나이였고 내가 태어난 달은 12월이었으며.
그와 내 사이 다름을 알려주는 건 그런 것뿐이었니. 난 술을 마시지만 그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I’m not from anywhere else
그들은 내게 회색으로 물들인 가죽 가방을 줬고. 그 안을 채워 넣을 만한 물건은 없었음에도. 카메라도, 단지 날 확인할 수 있는 조그마한 신분증 하나가 넣어졌을 뿐.
식탁 위에 놓인 것들을 물끄러미 보며. 그중 그 종이 묶음 하나도 슬그머니 그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 책은 어느 러시아인이 쓴 글로 이루어진 물질이었다.
키릴 문자들은 한글로 바뀌어있고.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 안 난 그 책의 마지막 장을 향해 도달하고 있었다.
‘달은 보아야지만 존재하는가, 그래서 난 존재하는 건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
그 질문 끝에 눈을 감은 채 되뇌었다. 해가 없으면 풀도 나무도 자랄 수 없으니, 그렇지만 그 빛은 너무도 가혹해 당신 얼굴조차 볼 수 없도록 만들기에, 그렇기에 달을 보며 꿈꿀 뿐 이 세계를 영영 믿을 수 없다는 그 이론이 날 깨웠을 때 그 책으로 얼굴을 덮고야 만 것이다.
그 얼굴이 사라지지 않아 떠오른다. 이따금 두 눈앞을 맴도는 게 있다. 텅 빈, 그 이름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보위부 요원인지 정찰국 요원인지 난 그 융통성 없는 자들의 소속을 알 길 없지만 내게 새로운 동행자들이 생겼다. 때로 날 사납게 대하던, 그건 내 기분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자동차 안 또는 비행기 안에서도, 머리 닿을 듯 낮은 천장과 곧 귀가 멍멍해질 기분에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둔지도 몰랐던 걸.
"곧 도착합니다. 준비하십시오."
차는 순안비행장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하지만 그 안 그 남자를 향해 손 흔들어주는 인민은 없고. 누가 금지한 건지. 집 밖으로도 거리로도 나와 그를 볼 수 없도록 그들 집 문을 다 잠가놓은 건 아니었는지.
공항 활주로가 있는 곳으로 차가 닿았을 때 그곳에 작은 비행기 한 대가 날 기다리고 있는 걸 봤다. 문을 열어젖힌 채, 그곳으로까지 계단을 이어 붙인 모습으로 말이다.
그 비행기가 어디로 향하는 건지 알 수 없었음을. 목적지는 모스크바다. 그렇지만 그곳에 착륙지가 있을지 난 확신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