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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만 기억

by 문윤범


처음과 끝은 없다. 이 장면들은 계속 흘러간다. 태어나는 순간도 죽는 순간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그대로 멈춘 채 있다.

영화를 보다 가끔 화면을 멈춰놓을 때. 화장실에 갈 때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 일이 있으면 그렇다. 누가 날 부른다. 그 음악소리가 들려오면 그걸 들며 난 손에 쥔다. 안데르센이 날 불렀다. 그럴 용기가 있다니. 먼저 전화를 걸 수 있는 일은 언제나 갈망하던 것.

안데르센이 말했다.

"영화 보러 갈래?"

그런 세계에 살며 그 세계를 보려는 심리를 난 알 수 없었지만. 난 다른 음악을 들었다. 심장박동보다 느리며 기분보다 더 우울한 음악을 듣는다.

"집에서 뭐해?"

하루 종일 곱씹고 또 곱씹어 이제 진절머리 난 듯 이젠 다른 일을 하려는 듯. 안데르센은 늘 그랬는데 그럴 때마다 난 한가로웠고 집 앞 술집에서 맥주를 마신다거나 그곳에서 공장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내 출근복에 대해 논한다거나 험담하고 뒤에서도 그러는 걸 알아 열이 받았다는 이야기는.

그 이름이 요슈아라고 했나? 그 자를 마주치면 눈이라도 이글거려야 할 듯 난 안데르센처럼 분노하거나 증오했는데 콘스탈렌 식당 앞에서 그를 봤을 때 내가 그런 모습일 줄 몰랐다. 가끔 난 안데르센이 된 듯했고, 빨개진 얼굴을 화장실 거울로 그 내 얼굴을 봤을 때 그는 취할대로 취한 모습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땐 늘 빈털털이인 것처럼. 내 주머니 속 돈을 녀석이 모두 털어간 듯 다음에는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까지 했는데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영화냐고 물었을 때, 그렇지만 어차피 그게 무슨 영화든 극장에 걸린 몇 편의 이야기 중 하나를 그 세계를 봐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증후군."

이삭 베리만의 작품을. 연못이 있는 것처럼, 그 못을 바라보는 듯, 꼭 움푹 파인 땅에 고인 물을 기다렸던 듯 난 그가 만든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처음과 끝은 없다. 이 장면들은 계속 흘러간다. 태어나는 순간도 죽는 순간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그대로 멈춘 채 있다.'

이후 난 안데르센에 먼저 전화도 걸게 됐고.

9월 난 누나를 만나러 여섯 시간 기차를 타고 그곳으로까지 갔고. 아마도 정확히 6년 만이었을 테니. 정확히 아마도.

그 영화를 본 뒤 난, 처음 그 독백을 들었을 때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믿었다. 굳은 신념처럼, 다 타고 없는 실오라기 끝 아직 남은 그 딱딱한 것처럼. 내 마음속에는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을 듯한 희망이 자리 잡은 듯했다.

아직도 그날을 지울 수 없는 건. 그 장면을 태우거나 찢어버리려 해도 그럴 수 없을 듯 그 모습들은 공기 속에 머물었던 듯 여전히 그곳에 있다. 난 떠나지 못했다. 여섯 시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건 없던 희망이 됐다.

내 삶에 그런 꿈이 있었던가. 희망과 같은, 눈 앞에서 타올라 그들 눈을 밝히고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 과연 존재했던가.


https://youtu.be/YEfJopPIbQg?si=9Tft6m5cCUfIkP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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