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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by 문윤범


토마스 알프레드손이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리메이크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다시 만드는지 새로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스웨덴의 영화감독이 스웨덴의 거장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한다는 게 놀랄 만한 소식으로 다가온다.

게리 올드만이 그 작은 호텔 방 안에서 말할 때.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연기를 볼 때 난 마치 보다 큰 세계에 있을 듯했는데.

'스웨덴 감독이 맞네.'

잉마르 베리만의 그 영화 그 장면을 보며 든 생각. 북유럽 사람들은 왜 실내를 잘 꾸미기로 유명한 걸까, 캐나다인들은 외투 파카를 튼튼하게 잘 만들어 보다 직설적인 듯한데 아이러니한 기분 또한 들고. 겨울 집 안에만 있는 사람들은 정말 그런 감각을 가지게 될까. 그 안 그런 깊은 고민 속에 머문다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의 게리 올드만 연기는 훌륭했던 게 아닐까. 난 영화 '페르소나'를 보며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될 줄 몰랐다. 아니면 감독 연출이 훌륭한 것이었을까. 답이 뭐가 됐든 난 새로운 질문을 한다. 난 왜 겨울에 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마저 그리워할까.

흉한 얼굴이 돼 다른 사람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두렵다면. 그런 얼굴을 한 자들을 보며 궁금할 때도 있었는데. 그 빛이 닿은 운명 얼굴이.

페르소나를 보며 생기는 또 하나의 관점이라면. 궁금증이라면 그는 왜 그토록 사람 얼굴에 대한 묘사에 집착했을까, 물음이라면 그 조명은 왜 배우들을 비춰 관객들을 깊이 빠져들게 하는 걸까 연결되는 길을 따라 걷듯 그 세상 속을 헤맨다. 난 지금 잉마르 베리만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토마스 알프레드손 영화에 빠져든 건 딱히 실내 촬영을 잘 한다 그런 게 아니었지만 만약 내가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에 빠져들고 있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연극을 보는 기분도 들며 그래서 많은 긴 대사들 또한 듣게 된다. 누가 내게 말하고 난 대답도 않은 채 지켜보기만 하지만.

'Faithless', 토마스 알프레드손 필모그래피에 새로 뜬 영화 제목이다. 충실하지 못한, 신뢰할 수 없는 그런 단어 뜻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person에서 끝에 a 하나만 붙여 새로운 단어가 되는 persona. 프랑스어 personne는 사람을 뜻하고 뻬흐손느, 아니 거의 뻭손으로 읽게 된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뜻했고 따라서 그 말이 이후 라틴어에 포섭된다는 설명이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 용어가 어떤 영화 감독이 자주 쓰는 배우 정도로 알고 그렇게 이해하는데. 대충 그런 의미라면.

감각이 그처럼 대충 이어지고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 때 그 장면들이 더욱 신비롭게 다가오기만 하고. 마냥 우아하도록 다듬은 게 아니었다면 더 큰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잉마르 베리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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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옷에 관심을 가지고 내 얼굴 몸을 연구하며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돈이 생겨 이 옷 저 옷 사모아 알게 된 것만은 아니었고 유럽 축구를 보며 멋있는 유럽 선수들을 보며 느끼기도 한 것이었다. 그때도 난 내 얼굴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사람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축구 선수들은 계속 뛰고 움직이니까. 카메라는 그라운드 한 가운데에 설 수 없으니.

요즘 트렌드는 흑인 모델들이 전면에 나서며 무엇이 진짜 우아한 것이었나 거꾸로 묻는 듯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관심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게 그렇지 않을까. 내가 무슨 옷을 입는가 그게 집 밖을 나가기 전 하는 첫 번째 고민이 아니었을까.

난 왜 이런 얼굴일까? 그게 내 하루 고민의 시작이라면. 가면 쓰는 일. 데이비트 베컴도 되고 이완 맥그리거도 되며 지금의 난 보다 과학적으로 움직이고 볼을 차는 플레이어 한 명을 만나기를 원하는데.

또한 축구 선수 이름을 내 등에 붙여 놓는 일처럼. 내가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얼굴이 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그 모든 일이 보는 관객마저 없어 아무 쓸모 없는 연출이 되어가는 것을 느낄 때 난.

아마도 영화를 그럴 때 본 듯하다. 일요일이면 비디오를 켜고 텔레비전 앞에 앉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장롱에 등을 기댄 채 농장에 다리를 걸쳐놓기도 하면서.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난 바다와 같은 세계를 더 잘 그려낼 수 있을까. 바다를 만나기 위해서는 좁을 길을 걸어야 했고 오르락내리락 걸어다녀야 했다. 거친 운전수가 모는 버스를 탄다거나 열차에 갇힌 채 땅 밑을 통해 이동해야 했으며.

오랜만에 흑백 영화를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게 흑백영화인지도 모른 채 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모든 색을 구분 지을 수 없었다면 난 과연 영화를 사랑하게 됐을까. 영화와 사랑한 뒤 마치 이별이라도 고할 듯했던 내게 더 이상은 의미 있는 말로 다가오지 않는.

빛을 느끼면서 배우들 연기를 감상할 따름이다. 잉마르 베리만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 얼굴을.


Persona, 1966/ Ingmar Berg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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