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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은 다섯 평 남짓한 방 안에서 나갈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문을 두드리면 박영화나 최성환이 바깥에서 그것을 열어줬다. 채광이 좋은 거실에는 창가로 소파가 하나 놓여 있고 지도자들의 사진이 맞은 편 벽에 걸려 있었다. 대변을 보는 것까지 그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것은 굴욕적인 일이었다.
삼시세끼를 꼬박 넣어주었고, 창문을 열어주러 올 때는 언제나 라 부장이 들어왔다. 이곳에 도착한 며칠 뒤부터는 그가 박영화나 최성환을 데리고 들어와 비디오테이프를 틀었는데 공산주의 교육 영상이었다. 일종의 세뇌 작업일까.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떠한 이유도 목적도 말해주지 않은 채 그들은 내게 그것을 보게 했고, 난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채로 신발공장 근로자들의 노동을 지켜보게 된다. 갑자기 공연단이 나타나 그들을 격려하는 장면에서는 헛웃음을 지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부심 느껴지는 컷이 아닐까. 그들은 그것을 현장경제 선동이라 불렀다. 느닷없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데 아연실색했다. 중앙예술경제선전대 소속의 인민배우까지 나와 만담을 펼치는데 미국식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는 듯했다. 그가 찌르는 정곡의 유머에 노동자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수해 현장에서 청년 돌격대 소속의 한 장병이 아코디언을 연주하자 난 잔뜩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것을 본다. 나를 위로해주려는 것일까. 세뇌를 하기 위해 비디오를 튼 것이 아니었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그런 영상들을 반복해서 보니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는 텔리비전에서 나오는 소리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쳐도 그 끝이 네모난 방의 모서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난 좌절했다. 창문은 깨고 부셔도 바깥에 철로 된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아 탈출을 꿈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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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간의 영상 교육을 마치고, 그리고 8일 째였나 그들은 내게 각본을 쓰라고 했다. 라 부장이 내게 한 말, 명령이었다.
"공책입니다."
그 옆에 펜을 놓는 모습을 보며 나는 화가 났다.
"뭐하자는 겁니까?"
펜과 공책이 놓이는 것을 보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들에게 따졌다.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한 채로 말했다. 나는 노트북이 있어야 글을 쓴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키보드가 있는 노트북을 달라. 그런 말이라도 하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공간 바깥으로 어떠한 소리들을 내보내고 싶지만, 그렇지만 달걀판으로 만든 벽 속에 갇힌 듯 그것들이 바깥에서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흡음재가 부착된 방에 있는 듯 모든 소리가 이곳 안에서만 맴돌았다.
이틀이 지났음에도 난 그것을 손도 대지 않았다. 펜을 들지도 공책을 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종이를 긁다 보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지 않을까. 그것이 찢어져 틈이 생기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 부장이 들어왔다.
최성환이 바깥에서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곧 라 부장이 들어와 창문을 열었다. 창가에 기대 선 채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공책을 펴 보지도 않는군요. 혹시 거기에 무슨 글자라도 적혀 있으면 어쩌려고요."
그리고 불을 붙였다. 나는 공책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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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 옆에 놓인 펜을 봤다.
"그건 빈 공책입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요. 그러니 뭐라도 써보십시오."
창가에 있던 라 부장은 내게로 다가와 담배 한 대를 내밀었다. 난 평소처럼 그것을 받아 입에 물었고, 그러자 라 부장도 평소대로 바지 주머니에서 불을 꺼내 붙였다.
"스스로를 실망시킬 일을 만들지 마십시오."
다시 고개를 들어 라 부장을 쳐다본다. 그러자 그는 창가로 가 등을 보인 채로 섰다.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낄 때 손목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손가락은 펜을 움직인다. 아들에게 쓴 편지가 마지막 감각으로 남았던 듯하다.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빈 종이를 바라봤다. 책상 위의 등은 하얀 종이를 조명하고 있었다. 누구를 무대 위로 올려야 하나. 하지만 그 전에 내게 죄가 있었나. 공산주의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존재였기에 앞서 나를 포획한 것인가. 나는 대표적인 좌파 예술가였는데 말이다. 전 정부에서는 나와 몇몇의 예술인들을 탐탁히 않게 여길 만큼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부른 건가. 하지만 공포 속에 가둬두면서까지 나를 데려와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나.
그 날도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책상 앞에 앉은 채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종이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잠에서 깨 눈을 뜨니 몇 줄의 선이 보일 뿐이었다. 펜으로 그은 것이었다. 수면 상태에 빠진 내 몸의 팔, 손가락은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것을 해놓았다. 타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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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으로 넘어가 이야기를 한다.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해변가를 걷는 한 백인 여자와 그 모습을 수평으로 따라가는 카메라. 습관이지만 나는 각본을 쓸 때 카메라 동선까지 미리 짜놓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배우들의 걸음걸이마저 그려놓기 때문에 그들이 큰 권한을 가지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독재자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영화는 배우들의 얼굴로 연상되는 것이다. 감독의 얼굴을 그리며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라.
그런데 이렇게 시나리오를 써도 배우는 어디서 구하나. 촬영감독은 누가 맡고 편집은 어디에서 하나. 장비는 제대로 갖춰졌나. 투자자는.
영화를 찍게 하기 위해 이곳으로 나를 부른 것이 아닌가.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각본이 3분의 1정도가 완성되었을 때 드는 생각이었다. 태워야 할 손님이 있는 열차처럼 달리다 멈췄다. 나를 부른 사람은 누구인가.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이라고 했다. 씻고 밥 먹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거실로 나갈 때면 추위를 느꼈다. 가을이 다가오는 듯했다. 여름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새로운 계절 앞에 있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고 몸에 한기가 들어 하루 종일 이불 안에서 뒤척인다. 그러다 잠에 빠져 다시 눈을 뜨면. 그럼에도 라 부장의 말처럼 달라지는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