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전 의원이 공부왕찐천재 홍진경에 나와서 문학 개념어에 대해 가르치는 영상을 봤다. 내가 알기로는 그는 문학에 애정이 많은 사람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시 하나를 놓고 어려운 단어들을 써가며 그것을 해석하려 할 때는 약간 어려웠다. 왜 쉬운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공부란 벽을 느끼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려운 단어를 이해하고 쓰면 시를 해독하는 것이 쉬워진다. 소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암호 같은 것일지 모른다. 구조적으로 굉장히 난해한 글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했던 건지 모른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시를 소설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공부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는 했다. 나는 소설을 어떻게 썼나. 마음 가는 길을 따라 갔다 말하면 멋질 것이다.
영화 평론가들 중에서도 한자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쓰는 단어가 대게 비슷하다는 생각도 한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이런 단어들을 많이 본 것 같다. 담론, 성취, 재기.. 그리고 관통.
통렬하다는 표현도 자주 쓰이는 듯하다. 우화라는 단어도 많이 본 것 같고. 모두 축약의 힘을 가진 단어들이다. 다른 말로는 암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검찰은 그 정도가 가장 심할지 모른다. 판결문 같은 것을 읽어보면 한자어가 정말 많은데, 하지만 최근 변화가 느껴지는 부분은 영어 단어를 쓰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사자성어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후안무치라는 사자성어가 유행이다. 추미애 전 장관이 천의무봉이라는 사자성어를 썼던 것도 생각나고, 고민정 의원이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되던 시절 상선약수를 꺼내들던 모습도 떠오른다. 국민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이 국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를 쓸 때가 많았다. 나쁜 생각으로 나보고 공부하라는 뜻인가 되묻기도 했다. 난 정치인들이 거대한 물살에 떠밀려 온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건 모두가 같다. 우리는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단 한 문장으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작가가 있다면 단어 하나로 지금의 모든 생각을 드러내보이는 정치가가 있다.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도 어쩌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과학을 하고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을지 모른다. 식당에 온 손님은 그 집 주인을 파악하려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애쓴다. 어느 순간에는 분석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언어가 바로 한자어와 영어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 영영 끼어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어는 통하는 길이 있다. 그것을 막거나 끊을 수는 없다. 새로 하나 내자니 이미 너무 복잡하다. 그 속에서 길을 찾는 일일지 모른다. 나는 아직도 우리나라를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