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과학자의 여정, 그 속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
“박 교수님, 주말인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혹시 잠깐 통화 괜찮으실까요?”
토요일 오후, 인사과장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물론입니다. 전화 주세요.”
“다름이 아니라, 다음 주 국제학회에서 교수님께 좌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연자들의 연구 분야가 교수님과 유사해서요.”
“네, 영광입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최신 이력서와 간단한 프로필 사진을 보냈다.
잠시 후 회신이 왔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학회 책자에 교수님 소개를 넣겠습니다.”
며칠 뒤 도착한 학회 책자에는 내 사진과 간결한 소개 문구가 실려 있었다.
‘좌장 / 중국 의대 부교수 / 2024 해외고급인재 선정 / 2025 학술상 수상자.’
이젠 ‘연세대 출신’이라는 후광 없이도, 내 이름 석 자만으로 소개될 수 있구나.
그 생각에 마음이 조금 뭉클했다.
한국에 있을 땐 늘 거대한 스승님의 그늘 아래 있었다.
학생으로, 포닥으로, 연구조교수로.
늘 ‘연세대’라는 이름이 나를 대신해 설명해 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롯이 나 혼자다.
기초부터 연구비, 실험, 논문, 강의까지 모든 걸 직접 감당해야 했다.
그 고독 속에서도 버텨온 시간들이, 결국 나를 이 자리까지 데려다주었다.
학회 전날, 인사과에서 연자들의 프로필과 발표 자료를 보내왔다.
각기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 — 종양생물학, 신경과학, 분자생물학.
나는 밤새 발표 순서를 정리하고, 각 연자의 강점을 요약했다.
좌장의 역할은 단순한 사회자가 아니다.
연자들의 흐름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일,
질의응답을 유도하고, 발표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행사 당일, 내 첫 제자이자 약대 수석 학생이
질의응답 시간에 똑 부러진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세션이 끝나자, 나를 향해 조용히 카메라를 들었다.
“교수님, 좌장 데뷔 기념사진 한 장이요.”
그 순간, 학자로서의 외로움이 잠시 잦아들었다.
누군가가 내 성취를 ‘기록’해준다는 것.
그건 연구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격려였다.
중국에 처음 면접을 보러 왔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부서는 인사과였다.
해외 고급인재 트랙의 교수로 총장 직속 면접을 통과했을 때,
총장님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90도 인사와 악수를 건네셨다.
그건 ‘우리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신호였다.
그 후로 인사과는 늘 나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학술상 추천, 연구비 지원, 교내 행사 초청까지.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곧, 해외 인재가 현지에서 뿌리내리는 방법이기도 했다.
학회가 끝난 뒤, 과장님은 조용히 내게 말했다.
“교수님, 교수님은 특별승진 트랙 대상이십니다.
성과만 꾸준히 내시면, 빠른 정교수 승진도 가능할 겁니다.”
그 말은 위로이자, 다시 달릴 이유였다.
가끔 생각한다.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모교의 스승님은 여전히 학회를 주관하시고,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연구조교수 선배는
여전히 스승님 곁에서 잡무를 도맡고 있다.
그 선배의 SNS 글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건 내 과거의 평행우주야.'
나는 떠났고, 독립했고, 그만큼 외로웠다.
하지만 그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한국에서였다면, ‘연구’와 ‘행정’은 다른 영역이었겠지만
중국에서는 두 세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학교의 인사과는 학회의 스탭이 되고,
연구자는 동시에 좌장이자 교류의 다리가 된다.
이제 나는 안다.
‘인재와 인사의 연대’란, 서로의 필요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신뢰를 쌓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르면 달려가고, 요청엔 성심껏 응한다.
그런 마음이 결국 나를 이방인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로 만들어주었다.
한국에서였다면,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제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한 사람의 교수’다.
이방인의 땅에서 피어난 연대의 온기,
그건 내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또 다른 에너지다.
언젠가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이 시간을 내 인생의 한 챕터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