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3년차, 임상 2년차
한국에서는 어딜가서 '간호사'라고 나를 소개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직업적 정체성이 굉장히 불투명했고, 한국 사회에서의 '간호사'의 인식은 '아 옆집에 쟤도 하고 고등학교 때 껌씹던 걔도 하고, 사돈의 팔촌도 다 하는 그 간호사요? 그 병원에서 일하는거 힘들지 않아요?' 하는 주위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그 사돈의 팔촌, 고등학교 때 껌씹던 날라리들과 같이 일하면서도 맨날 털리는 내가 하염없이 바보 같았던 순간의 연속들이었을뿐 아니라.
'그 어느병원다녀요? 아 무슨병원이요? 삼성이나 이런데 다녀야 좋은거 아닌가?'의 콤보로 병원에서 어느병원에서건 환자들을 열심히 간호하고도 그 남들이 다 아는 병원에 다니질 못해서 적은 돈 받으며 열심히 일하는 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디서 물으면 '간호사'라기 보다는 그냥 일다녀요. 남들과 비슷한 일을 해요 하며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리고 뭐 그런 병원 들어가서 일했더라도, 누가 물으면 곧죽어도 거기 다닌다고는 이야기 안했다. 그냥 괜히 배알이 꼴리기 마련이었다. (아 그런 분들이, 병원에서 일한다 그러면 누구보다 먼저 나에게 가장 빠른 진료예약과 알만한 교수님 추천을 원하시긴 한다)
미국에 와서는 누가 뭐하냐고 물으면 "RN"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 가장 적응이 안되었던게, 남들이 나에게 "너는 간호사잖아"라고 치켜세우는 거였다. 아니 도대체, 한국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동네북 '간호사'가 여기선 도대체 뭐길래 이런 식으로 나를 띄워주는거야 기분좋게~ 하면서 이제는 자신있게 '간호사'라는 직업이 좋다고 말하고 다닌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웃기다.
미국에서 RN은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중에 하나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높은 임금도 있지만, 널싱스쿨 자체를 졸업하는게 너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졸업한 친구들 말에 의하면, 학기가 지날 수록 클래스에 있는 애들이 사라진다고 했다. 결국 졸업은 정말 열심히 한 애들만 한다는 의미였다. 근데 한국도 마찬가지다. 간호사가 부족해서 간호대를 늘린 간협 덕분에 수능 3등급부터 9등급까지. 고등학교 때 껌씹던애도, 옆집에 사돈의 팔촌도 다 간호학과를 가긴 하지만 졸업해서 국시를 봐서 '간호사'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여정이다. 게다가 한국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죄다 열심히 일한다. 다만, 그래서 너무 서로에게 친절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곳에 와서 상대적으로 나은 사회적 인식과 서로에게 너무 혹독하지 않은 동료들을 만났다는 점이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은 분명히 있다. 30살이 훌쩍 넘어서 이민온 나는 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창조해야 했다. 원래도 돈을 잘 모으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삶을 건설하는데는 비용이 많이 든다. 높은 물가로 인해 쉬프트가 캔슬이 되면 손가락을 빨고 살아야 하는 수준으로 급격히 삶의 수준이 떨어지긴 하나 그래도 일하려면 어디서든 일 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장점이긴 하겠다.
또 하나 더, 영어를 쓰면서 생활한다는 것. 나는 영어에는 자신감이 있다. (사실 개떡같이 말하고 자신감만 있는거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쓰는 언어와 나의 피부색 때문에 나에게 유리천장이 있지 않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든다. 다른 인종들과 일하면서 내가 여기서는 확실히 소수자임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반응에 괜히 피해의식을 껴서 반응을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소시민의 삶을 살다가 왔지만, 미국에 오니 정말 개미 발톱만큼도 안된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미국 생활이 한국보다 이백배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그 '사회적 인식' 하나 때문인 것 같다. 인정욕구가 강한 나는 인정을 받고 살고 싶은데, 미국 살면서 미국 간호사를 한다니까 다 쓰러져가는 병원에서 일해도, 한국 사람들은 내가 '미국 간호사'임에 주목을 한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열악한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미국'에서 '영어'를 쓰며 일한다는 것 자체로 굉장한 인정을 해준다.
소수자로 살고 있지만 미국은 또 어떤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프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를 고쳐주고 돌봐주는 사람이다. 길가다가 마주치는 아시안 여자인 나는 어떤지 몰라도, 병원에서 스크럽을 입고 있는 이 아시안 여자는 주사도 놓고 약도 주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딱히 무시할 수가 없다. -물론 미국 사람들은 겉으로 누구를 함부러 무시하진 않는다- 소수자와 이민자를 위주로 돌아가는 리버럴한 캘리포니아에 있다보니 그런 교육또한 철저하게 한다. 표정은 겟아웃에서 보는 사람들 같아도 말투는 따뜻하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간호사를 하는 분들은 미국에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미국의 업무가 너무 좋거나, 미국 생활이 너무 좋은 것이라기 보다는 한국에서 너무 미저러블한 삶을 살고, 내가 열심히 살아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시간과 과정은 오래 걸리지만 그냥 여기 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요양병원이건 종합병원이건 재활병원이건 빅 5를 다녔건 말건 - 개인적으로 빅 5타령 제발 그만좀- 미국 가는 일은 해볼만 하다는 말이다. 여기 와선 똑같은 이민자로 근무를 하게 될테니 - 아 근데 그 와중에도 학벌/학교/출신 병원 따지는 분들이 분명 있다, 그러니 그런 분들과는 어울리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