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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id Kwon Aug 19. 2021

[작은 꿀벌처럼 맛집천재] 크루엘라처럼 욕망 추구하기

지난 목요일 회사에서 회의를 하러 모였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힙한 분위기가 회의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저를 제외하고는 다른 2-30대 여성 직원분들은 모두 블랙&화이트가 힙하게 돋보이는 드레스 코드를 지키고 있었어요.


제 앞에 앉은 타 부서 대리님은 백금발과 흑발이 섞인 머리를 하고 있었어요. 제 옆자리에 앉은 대리님은 무광 블랙 네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거 아세요? 무광 블랙은 빛은 반사하지 않아 그 조그만 손톱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더욱 시선을 잡아끕니다. 아니쉬 카푸어가 개발한 블랙홀처럼 보이는 반타 블랙처럼요.


‘우와, 멋지다. 우와, 힙하다’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새에 블랙&화이트 무드가 유행하고 있나?’하고 유행의 존재 자체를 놓쳐버린 것 같은 당혹스러운 마음도 있었어요. 재미없는 블랙 무드면 신경 안 쓰이죠. 그런데 올드한 블랙 무드가 아니라 신경 쓰이는 재미있고 힙한 블랙&화이트 무드의 드레스 코드, 저만 빼고 존재하는 그 드레스 코드에 저도 끼이고 싶었거든요.


궁금증은 곧 풀렸습니다. 지난 주말 홍대에서 블랙&화이트가 가득한 영화 ‘크루엘라’를 보면서요. 블랙&화이트 드레스 코드는 이 영화에 호응한 혹은 호응할 가능성을 가진 여성들의 은밀한 징표같은 드레스 코드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추천해준 좋아하는 지인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작은 별처럼 반짝이는 미모에 ‘크루엘라’ 속 엠마 스톤 처럼 스타일리시한 몸선, 패션 센스를 지닌 이 지인은 에스텔라처럼 빛나는 재능과 역경에 쉽게 굴하지 않는 의지력, 주변 사람들을 아끼는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하지만 엄격한 위계질서를 가진 방송가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부캐’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부캐인 그녀는 말 붙이기 어려운 쎈 캐릭터로 변해요. 마치 ‘크루엘라’처럼요.


‘크루엘라’는 제 주변 모든 여성들이 쌍수를 들고 좋아한 영화였습니다. 엠마 스톤이 연기한 ‘크루엘라’의 캐릭터가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이 연기한 ‘미아’와는 비교되지 않게 좋았다는 사람들도 속출했습니다. “너무 착한 캐릭터는 이제 재미없어”라는 말입니다. ‘건축학개론’의 ‘서연’이나 ‘라라랜드’의 ‘미아’처럼 여성이 보기에는 가슴 아프고 불쌍한 캐릭터인데 남성에 의해서 ‘괜찮은 여자’니 ‘악녀’니 품평당하는 캐릭터보다 그냥 주체성 있고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빌런’이 되고 싶다 이거였어요.


저는 ‘라라랜드’도 ’건축학개론’도 좋아합니다. 영화 속 지질하고 못난 남자 캐릭터들의 모습에서 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우쭈쭈받고 자라와서 괜찮은 사람이려고 노력하지만 남보다 혜택받고 우대받아온 티를 숨길 수가 없어 역경 앞에서 연약하고 한심한 제 모습을요.


하지만 이런 저도 승승장구하는 강한 악녀 ‘크루엘라’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어요.


제가 ‘크루엘라’에서 좋았던 점은 엠마 톰슨과 엠마 스톤으로 이루어진 나이 차가 있는 투 톱 여성 배우가 이끌어가는 인물 구도였어요. 그리고 여자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영화 속 캐릭터의 등장이었습니다. 저는 갱스터 무비팬입니다. 갱스터 무비팬으로서 자신있게 말하자면 ‘대부’, ‘좋은 친구들’부터 ‘도니 브래스코’, ‘로드 투 퍼디션’, ‘디파티드’, ‘히트’에 이르기까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대부분의 갱스터 무비들은 남성 배우들로 가득 채워져 있죠.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남성 투 톱 배우를 내세운 갱스터 영화는 흔한 것이었어요.


물론 시대를 앞서간 감독님들도 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도 그렇고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1995년작 ‘의식(A Judgement In Stone)’같은 작품도 있었죠. 못 본 분을 위해 설명해 드리자면 ‘디파티드’같은 영화인데 총을 쏴대는 갱스터가 여성인 영화예요. 이자벨 위페르를 좋아하지만 고혹적인 특유의 매력이 있는 여성 배우로 연기 폭을 한계 짓고 있었어요. 그러다 이 ‘의식’이란 영화를 보고 나서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동네 껄렁한 건달역을 하며 부잣집에 총을 쏴대는 체제 전복적인 모습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이자벨 위페르가 좁은 연기 폭으로 연기한게 아니라 좁은 배역만 던져준 영화계가 문제였던 거죠.


영화 ‘크루엘라’를 본 여자 어린이들은 승승장구하는 강한 악녀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선택지를 얻었습니다. ‘조커’에 공감하거나 몰입하고 몸을 키울 수 있는 꿈을 가졌던 남자들처럼요. ‘나의 첫번째 수퍼 스타’나 ‘크루엘라’같은 영화를 통해서 여성들은 나이 든 뛰어난 여성이 도움되는 충고와 영감을 주는 존재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적이라도 마냥 적이 아니라 때론 연대할 수 있고 시대를 앞서간 자신과 같은 고충이 있었던 존재라는 점을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이었습니다. 나이 든 여성과 젊은 여성에게 입체적인 캐릭터를 부여하고 연결 고리를 만들어 준다는 것, 저는 이 부분이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그게 천재적인 악과 악의 연결이어도 말이에요.


20년 전의 저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에 열광했습니다. 그녀는 ‘악은 결국 승리한다’라는 주제로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씨’시리즈를 집필했어요. 그 차분하고 시니컬한 관점이 저를 열광시켰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여성인 저는 여성 캐릭터가 연기하는 ‘악은 결국 승리한다’라는 캐릭터를 영화관에서 보게 되었어요. 시간이 참 오래 걸렸어요, 그렇죠?


욕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건, 내 진정한 욕망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끔 만듭니다.


한때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부유하고 성공한 40대 여성의 연애관과 교육관을 다룬 글이 있었어요. 그 여성분은 질문하는 방식으로 교육하는 유태인식 교육법 하브루타 방식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녀가 본능적으로 갖춘 본질적인 욕망에 위배되지 않도록 자녀를 가르친다고 말했던 부분입니다.


자녀가 선천적으로 추구하는 욕망에 위배되지 않게 교육하는 방법에 따르면 ‘약자를 돕고 싶다’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아이의 욕망을 묻고 결정을 하게 한다고 해요. ‘돕고 싶지 않다’라고 대답하면 사회적 약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존중하되 돕지 않도록 가르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약자를 도와야 한다’라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해는 끼치지 않되 타고나지 않은 욕망을 강제하지는 않는 방식인 거죠. 솔직하게 욕망을 추구해야 결국은 마음이 평온해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이 그 여성분의 가치관이었습니다.


영화 ‘크루엘라’에서도 에스텔라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자신 안의 뛰어난 재능과 거침없고 배드한 기질을 따르기로 마음먹는데요.


과연 나의 본능적인 기질은 뭘까, 내가 해보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그 솔직한 욕망의 추구를 브런치에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착하면 착하게 억지로 나쁜 척 하지 않고 감성적이면 감성적이게 억지로 쿨하려고 하지 않고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말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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