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동안 있었던 9번의 이사 기록.
올해로 결혼 13년 차에 들어선다.
그동안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 둘로 시작한 우리가 지금은 다섯이 되어 있다는 것만 보아도 우리에게 그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작년 9월에 있었던 마지막 이사를 포함하여 우리는 13년 동안 총 9번의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 9번의 이사 중 아이가 어렸던 3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 차를 사용해 (평범한 suv였다) 셀프 이사를 했다. 물론 한 번에 옮긴 것은 아니고 여러 차례 날라야 했지만 셀프로 도전해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짐은 간소했다.
아이 셋을 키우며 셀프 이사가 가능할 만큼 그럭저럭 성공적인 미니멀라이프를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무려 1~2년마다 해왔던 엄청난 빈도의 이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짐이 쌓일 만하면 이사를 했고 이사를 준비하며 비우기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오늘은 우리가 거쳐 왔던 집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결혼 전,
‘우리 헤어지자’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이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해 왔다.
결혼 적령기였던 남편과 만남 초부터 꾸준하고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나누어 왔고 우리의 애정전선은 항상 이상 무! 였기에 그의 뜬금없는 이별 통보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유를 들어보니 당시 남편이 하던 사업이 망해 결혼은 물론이고 더 이상 연애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남편에게 당시 고작 23살의 어리고 용감했던 나는 ‘내가 모아둔 돈이 조금 있으니 일단 결혼하자’라며 프러포즈하였다.
(내가 그런 용감한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다소 벗어나기에 생략하겠다.)
그렇게 우리의 대단히 소중하지만 조금은 초라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집.>
용감하게 시작된 된 우리의 신혼집은 다섯 평짜리 작은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어찌나 작았던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하루는 남편과 사소한 이유로 다투고 혼자만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그 작은 집에서 얄미운 남편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층에 올라가 납작 엎드려 있는 것뿐이었다.
화가 잔뜩 난 채 복층에 올라가 납작 엎드려 있는데 순간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 냉랭한 공기 속에서 불편을 겪으며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자존심을 버리고 사과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개인적인 공간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던 그 작은 집에서 우리는 다툼이 있을 때 최대한 빨리 화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결혼 6개월 차, 첫 번째 집에서 예상치 못했던 첫 아이가 생겼다.
큰 축복이었지만 환기도 잘되지 않는 작은 오피스텔에서 갓난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두 번째 집.>
만삭 무렵,
산후조리 때까지만 함께 지내는 조건으로 친정으로 합가 했고 새로 태어난 첫째를 포함한 우리 세 식구는 결혼 전 내가 쓰던 방에서 지냈다.
새로운 식구는 안아 올리면 품을 가득 채우지도 못할 만큼 몹시도 작았다. 하지만 그 몹시도 작은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은 1인분을 톡톡히 했다. 아니 그 이상을 했다.
그 작은 방에서 우리 세 식구가 지내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물건과 옷을 끊임없이 추리고 줄이고 비워야 했다. 그렇게 단출하게 가장 필요한 것만 남긴 그 작은 방은 우리 세 식구가 서로를 탐색하고 적응하고 사랑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돼 주었다.
그 힘들다는 신생아 육아 시기를 친정엄마의 든든한 도움으로 수월하게 보낼 수 있었고 열 달 아이를 품어 고단했던 몸은 신속히 회복되었다.
산후조리 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세 번째 집.>
친정이랑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30년이 넘은 대단지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높이의 건물이 빼곡히 모여 있었고 우리 집은 그중 4층에 있었다.
갓난아이를 안고 1층에서 4층까지 오르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한번 외출할 때마다 챙겨야 하는 아기 짐은 어찌나 많은지!
아기 짐을 줄이기 위해서 내가 굳게 마음먹고 한 선택 중 하나는 직수였다.
분유, 젖병, 보온병, 소분기, 젖병소독기 등의 수많은 물건을 비울 수 있었기 때문에 직수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미션이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모유의 양이 충분하지 않아 매우 잦은 수유를 해야 했고(거의 종일!), 심하게 온 젖몸살로 이틀에 한 번은 불에 달군 바늘로 가슴을 직접 뚫어야 했다. 날카로운 쇠붙이의 따끔한 감각은 젖몸살의 고통에 비하면 되려 시원하다고까지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했던 엄마였다.
그렇게 결국 직수에 성공한 나는 26개월이라는 긴 시간 완모에 성공했다.
그렇게 새로운 공간에서 아이를 키우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가는 사이 둘째가 생겼다. 전세 기간이 끝날 무렵 집주인이 집을 팔 예정이라며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만삭의 몸으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네 번째 집.>
그 사이 집값이 폭등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예산에 맞추어 연립이 모여 있는 주택 단지로 이사했다.
세 번째 집보다도 작은 10평짜리 작은 투룸이었다.
그래도 햇살이 잘 드는 큰 창이 있는 밝은 집이었고 무엇보다 아이를 안고 오르내리기 편한 2층이라 마음에 들었다. 집 바로 앞에 놀이터가 있는 것도 좋았다.
나는 이 집에서 앞으로의 육아 인생을 바꾸어 줄 중요한 변화를 했다.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한 것이다.
그 작은집에서 네 식구가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 고양이까지 다섯 식구였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시작한 미니멀라이프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육아 미니멀리즘은 답답한 육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았고 삶을 바꾸어 주는 기적 같았다.
그동안의 정신없던 육아가 여유 있는 육아로 바뀌어 나가고 묵직하고 버겁기만 했던 육아의 무게가 점차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는 그 해방감이란!
물건을 비울 때마다 찾아오는 그 중독성 강한 희열에 빠져 부지런히 빠른 속도로 물건을 비워냈다.
그리고 물건을 비운 만큼 그 자리를 가족과의 시간과 나에게 가치 있는 것들로 채워나갔다.
돌아보면 이 작은 집에서의 기억은 온통 따뜻하고 다정하기만 하다.
작은집에서 너무 행복해서였을까..?
예정에 없던 셋째가 찾아왔다. 아무리 물건을 비웠다고 해도 다섯 식구가 10평의 공간에서 살 수는 없었다. 새로운 집이 필요했다.
<다섯 번째 집>
방 세 칸 화장실 두 개가 있는 신축 빌라로 이사를 했다.
갑자기 넓어진 공간에 아이들은 신이 났고 나도 설레었다. 짐이 워낙 없어서 거실에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이사한 다음 날 오전 11시경. 짐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밑에 집에서 올라왔다. 너무 시끄럽다고 한다. 자신은 3교대를 하기 때문에 낮에 잠을 자야 한다고 낮에 청소기를 돌리지 말라고 한다.
당황스러웠지만 이해하려고 했다. 우리 집이 짐이 너무 없어서 소음이 더 잘 전달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음방지 매트를 여러 장 깔고 청소기를 소음이 나지 않는 밀대로 바꾸었다.
며칠 뒤 오후 2시. 실수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밑에 집에서 올라왔다.
무언가 떨어뜨리는 소리가 나서 몹시 놀랐다고 한다. 주의하겠다고 했다.
예민하신 분 인 것 같아서 편지를 쓰고 과일을 사서 밑에 집에 찾아갔다. 소음이 있어서 불편하시면 전화하시라고 핸드폰 번호도 남겼다. 그게 실수였을까? 매일 같이 전화가 오고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엄청난 소음으로 집 안이 울리기 시작했다. 밑에 집에서 층간소음 보복 우퍼를 천장에 설치한 것이었다. 임신 중이었던 나는 콘서트장 같은 그 진동과 소음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래도 우리가 가해자이니 이해하려고 했다.
아이들이 조금만 시끄럽게 해도 살살 걸으라고 까칠하게 외친다.
어느 날 문득 발 뒤꿈치를 들고 집안을 걸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 온다.
더 이상 집이 편안하지 않다.
남편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외출한 어느 날.
임신 중이라 쏟아지는 잠에 잠깐 눈을 붙이려는데 밑에 집에서 또 문을 두드린다. 아이들이 뛰고 너무 시끄러워 참을 수 없어서 왔다고 한다.
순간 발끈하여 아이들은 아빠와 모두 외출했고 나는 자려고 누워 있었다며 집 안을 보여드렸다. 불이 꺼져있는 조용한 우리 집을 탐탁지 않은 눈초리로 둘러본 후 내려간 아주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서 이내 층간소음 보복 우퍼를 다시 작동한다.
알고 보니 전에 살던 사람도 밑에 집과의 갈등으로 크게 싸우고 난 후 이사를 갔다고 한다.
사람과의 갈등에 특히나 취약한 나는 그 집에서 일 년도 채 살지 못하고 만삭의 몸으로 또다시 이사를 했다.
<여섯 번째 집>
도망치듯 급하게 집을 알아보았다. 층간소음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이사한 터라 1층만 찾다 보니 적당한 매물이 없었다.
겨우 찾아낸 30년 된 한 동짜리 아파트 1층. 자세히 알아볼 틈도 없이 서둘러 계약하고 이사했다.
우리 집 베란다는 주차장과 이어져 있어 매연으로 창문을 열어 놓기 힘들었다.
게다가 잘못된 구조로 리모델링이 되어 있어 해가 하나도 들지 않아 한낮에도 불을 켜고 지내야 했고 겨울에는 깔깔이와 패딩을 입고 생활해야 할 만큼 추웠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터지고 한 순간에 세 아이와 나는 춥고 어두운 그 집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해가 들지 않는 공간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세 아이와 24시간 함께 고군분투하며 지내던 나는 하루하루 말라가듯 지쳐갔다.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서둘러 이사를 계획했다.
<일곱 번째 집>
대규모 단지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번에는 주거 환경을 꼼꼼하게 따져 보며 이사를 했다. 1층이었고 해가 무척 잘 들어서 코로나 기간에 종일 집에 있어도 쾌적했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다가 신축 아파트로 오니 모든 것이 편리했다. 단지 내에 차가 다니지 않아서 아이들이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고 마음껏 타고 달릴 수 있었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보송한 상태로 차에 타고 내릴 수 있었다. 꽤나 재미있는 놀이기구들로 꾸며진 놀이터엔 언제나 복작복작 아이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전에 있던 집에서 말라가던 나는 새로운 햇빛과 신선한 물을 듬뿍 마신 듯 다시 피어났다.
남편이 계획한 이사는 잘한 결정이었고 성공적이었다.
일곱 번째 집에서는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계속 노리고 있던 경쟁률이 높던 아파트 청약에도 당첨이 되었다! 2년만 있으면 진짜 우리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입주를 기다리며 한 번의 전세 연장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시기 임대차 3 법이 발효되었기에 한 번의 전세 연장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부푼 기대와는 다르게 전세 연장은 불가능했다.
집주인이 직접 거주한다며 나가달라고 했다. (뒤늦게 알아보니 집주인은 거주하지 않았고 전세금을 올리기 위해 우리를 내보낸 것이었다.)
철저한 을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이사를 했다.
<여덜번째 집>
우리 가족 역사상 가장 시련을 주었던 문제의 집이다.
2년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안일했던 것일까? 수 차례의 이사 경험으로 인해 지나치게 자신했던 것일까?
아니다.
안일하지 않았어도 자신하지 않았어도 전세 사기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거 문제로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었어도 같은 문제에 함께 맞서며 우리 가족은 여전히 단단했다.
<아홉 번째 집>
우여곡절 끝에 우리 집으로 이사했다.
결혼 12년 만에 내 집 장만에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지분이 은행에 있고 우리의 돈은 여전히 여덟 번째 집에 묶여 있지만 어찌 되었든 명의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다.
이 새로운 공간에서는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 나갈지, 어떤 일들로 더 단단해 질지 기대가 된다.
의, 식, 주 인간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중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주’.
하지만 나는 결혼 후 주거 환경이 한 번도 안정적이었던 때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홉 번의 이사를 겪으며 주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월세, 반 전세, 전세, 자가 모든 형태를 경험해 보았고 오피스텔, 빌라, 연립, 대단지 아파트, 단독 아파트, 주상복합, 신축아파트 등 모든 주거 환경을 경험해 보았다.
나의 주거 환경은 늘 불안정했고 언제든 갑이 나가라면 나가야 했다. (지금은 은행이 갑인 것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다섯 식구는 주거 공간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고 단단했고 따뜻했다.
그런 지난날들을 통해 ‘주거’는 공간의 부분이나 공간을 채우는 물건보다 그 안에서 오는 안정감, 가족들의 사랑, 화목과 같은 가치가 채워질 때 비로소 그 욕구가 온전히 충족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네 번째 집에서 내가 느꼈던 따뜻함이 주거 ‘공간’의 안정감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에서 온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주거의 본질, 가정의 본질일 테지.
이런 가장 중요한 본질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인식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 내가 미니멀리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13년 전의 내가 13년 후의 지금 나의 모습을 전혀 예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내 삶도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어떤 변화가 온다고 하더러도 주거 공간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가 안정감을 가지는 한 나의 주거 환경이 어떠하든 나는 여전히 안정감을 느끼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