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어느 여름날,
6명의 자녀를 키워내신 어르신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식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애가 셋이니 밥 해 먹이는 일이 숙제 같아요.
장을 보러 가면 몇 개 담지도 않았는데 십만 원은 훌쩍 넘긴다니까요!
그런 장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보는 것 같아요"
"힘들지 그럼.
나도 식구가 많아봐서 애기 엄마 마음 잘 알아"
"그러고 보니 어르신은 8인분의 식사를 매일 준비하셨겠네요!
도대체 여덟 식구 식사 준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뭐 별 수 있나?
그날그날 먹을 거 장 봐다가 부지런히 밥 해 먹이는 거지"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장 보는 것도 힘든데 매일 장을 보셨다고요?"
"아무래도 그렇지, 그땐 냉장고가 없었으니까."
".... 네?
냉장고가 없었다구요...?!
그러면 음식은 어떻게 보관해요?
겨울은 그렇다 쳐도 여름에는 금방 상하잖아요?"
"그래서 많이 해두면 다 망가져버려.
그날그날 한 끼 먹을 만큼만 밥을 해서 다 먹어 치워야지."
뎅.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니.
상상도 못 해봤습니다.
자식도 많이 낳아 먹일 식구도 많았던 그 시절.
매일매일 버려지지 않도록 하루 먹을 만큼만 장을 보고,
욕심내지 않고 한 끼 먹을 만큼 밥을 짓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나름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몹시도 부끄러워졌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어르신과의 대화 후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솥 가득 끓여 솥 채 넣어 둔 미역국이 보입니다.
다섯 식구 먹이려면 항상 냉장고를 채워둬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빈자리가 보일라치면 두 손 가득 장을 봐다가 부지런히 채워 넣기 바빴습니다.
막상 사 온 음식을 냉장고에 채워 넣다 보면 자리가 부족해 이미 사온 식재료를 어쩌지 못하고 이리저리 테트리스를 하기 일쑤지만 원래 다 그런 거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해먹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계획 없이 담아 온 신선 식품들은 결국 식탁에 오르지 못하고 망가져 쓰레기통행이 됩니다.
부족한 것보단 남는 게 낫지! 하며 욕심부려 음식을 하고선 남은 음식은 냉장고에 보관해 두며 알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냉장고로 들어간 음식은 다시 손대고 싶지 않아 결국 버려집니다.
냉동실은 또 어떤가요.
대용량 포장된 야채를 잔뜩 사와 일일이 소분해서 냉동시켜 두고는,
채워진 냉장고만큼이나 살림력도 채워진 듯하여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고기에, 생선에 해산물까지 알차게 얼려두고 밥 차리기 귀찮을 때 요긴하게 쓰이겠지 싶어 냉동식품 들도 종류별로 꾹꾹 눌러 채워뒀습니다.
친정과 시댁에서 먹으라고 나누어 주신 식재료는 비닐봉지채 넣어두어 정체를 알 수 없이 꽝꽝 얼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채워 놓은 냉동식품들은 내용물을 파악하기 힘들어 결국 소비기한을 넘기고야 맙니다.
그렇게나 부지런히 냉장고 가득 음식물을 채워뒀음에도 매 식사시간이 되면 '오늘 뭐 해먹이지..' 하는 고민에 빠지고 아이들의 요구에 못 이기는 척 배달앱을 실행시키고야 맙니다.
지난날을 반성하며 냉장고를 비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유통기한이 지난 소스류, 냉동식품을 모두 비웁니다.
구매 후 딱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이름 모를 소스를 비우며 괜히 마음이 쓰라립니다.
왜인지 초고추장은 세 통이나 있습니다.
아마 오징어를 데치거나 브로콜리를 데친 후 찍어 먹으려고 사뒀을 테지요
이미 냉장고에 두통이나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입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생각없이 채워두기 바빴던 과거의 제 자신이 미련스럽고 한심합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며 굳게 다짐해봅니다.
그렇게 기간이 지나 못 먹은 아까운 음식들을 다 비운 후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냉장고 파먹기'라고도 하지요.
장보기를 중단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들로만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냉장고 파먹기를 지속할 수록 냉장고 속에 어떤 식재료가 있는지 한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재료들을 빨리 파악하니 다음 식사를 준비하는데도 수월합니다.
대량 장보기를 중단하고 오늘 저녁 메뉴에 꼭 필요한 재료 한 두 가지만 동네 야채가게나 새벽배송으로 구매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비워지는 냉장고를 보며 그동안의 죄책감도 비워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저희 집 냉장고는 여전히 채워져있습니다.
하지만 1+1, 세일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어르신과의 대화를 떠올립니다.
냉장고가 있지만 냉장고가 없듯이 살아가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미리 쟁여두지 않으니 매끼 식사가 신선해집니다.
먹일 입은 많은데 요리가 서툰 탓에 그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냉장고를 비우고 나니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은 못해줘도 신선한 식사는 줄 수 있겠다는 작은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게으른 어느 날의 저를 위해 적당히 냉동식품을 구매합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도 있었다지만,
저는 전날 밤에 주문한 물건이 다음날 새벽이면 문 앞에 도착하는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련하게 문명을 거부하기보다는 과거의 검소함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제철음식을 사다가 한 끼 가볍게 먹는 기쁨을 배우고 있습니다.
미니멀라이프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오늘의 나의 하루가, 나의 냉장고가 미니멀하지 않다고 해서 풀이 죽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조금씩 욕심을 버리다 보면 버려지는 음식도 사라지는 날이 올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