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영화 티켓을 얻었다.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예매권인데, 어린이집에서 나눠줬다고 한다. 씨네패밀리 앱을 다운로드하면 해당 예매권을 등록할 수 있고, 앱 신규 가입 이벤트라며 무료 티켓을 한장 더 줬다. 요즘 둘이서 영화 한 편 보려면 3만 원은 쉽게 들어가는데, 이게 왠 횡재인가 싶어 아내와 함께 냅다 다녀왔다.
극장 건물에 들어섰더니 건물은 크고 화려한데 저 멀리 극장 하나만 불을 켜고 있어서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겼다. 평일이긴 하지만 초저녁인데, 입점 업체들이 모두 문을 닫고 있는 걸 보니 골목 상권만 경기가 안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매표소에는 직원이 아예 없었고, 팝콘 판매대에서 직원 두 명이 팝콘과 티켓 판매를 겸하면서 안내까지 도맡고 있었다. 상영관은 더 심각했다. 그 넓은 상영관에 얼추 다섯 팀 정도의 관람객만 보였다. 좌석은 일반석과 커플석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앞뒤 간격도 넓고 좌석이 매우 편안하고 좋았다. 이렇게 좋은 시설을 갖추고 무료 관람권까지 배포했는데, 초저녁 관람객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극장산업의 불경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한산한 상영관에 들어서면서, 혹시 《조커 2》가 너무 재미없어서 관객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조커 1》을 봤지만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거렸다. 홀어머니와 함께 허름한 빌라에서 살면서 사회에서 루저로 여겨지며 괄시와 천대를 받았다가 조커로 분장한 상태에서 권총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생방송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자를 권총으로 쏴 죽인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지옥으로 연결될 것 같은 높은 계단을 조커가 위험스레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장면만큼은 워낙 강렬해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살인을 저질렀던 아서 플렉이 감방 생활을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손과 발이 쇠사슬로 묶인 상태에서 교도관이 성의 없이 해주는 면도를 받다가 살이 베이고, 그 흐르는 피를 핥아서 피를 닦는 장면에서 광기 어린 조커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오직 비참하고 무기력한 죄수의 모습만 선연했다.
아서의 변호사는 재판을 앞두고 아서에게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며 재판전략을 설명한다. 아서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조커라는 또 다른 인격을 만들어냈으며, 그의 범죄 행각은 모두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라는 별개의 인격이 저지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서는 담배를 얻어 허기진 배를 채우듯이 깊게 빨아드리며 담배가 주는 아늑함과 몽상 속으로 빠져들 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무기력한 감방 생활을 이어가던 아서 플렉은 노래치료를 받는 수감자 시설을 지나다가 그를 향해 머리에 총을 쏘는 시늉을 하는 한 여성과 마주친다. 그녀는 조커를 만나려고 일부러 감옥에 들어온 리 퀸젤이었다. 그녀는 극장에 불을 지르고 탈옥을 시도하며 아서에게서 조커의 본성을 일깨운다. 그녀는 탈옥 사건 이후 독방에 갇힌 아서를 찾아가 조커로 분장시킨 후에 그와 관계를 맺으며 그의 조커 본성을 되찾으려 한다.
재판이 시작되자 조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고조된다. 수많은 조커 추종자들이 재판이 열릴 때마다 모여들며, 아서의 감방 동료들은 무기력한 사형수 아서가 아니라 반사회적인 조커의 모습에 환호한다. 할리 퀸과 대중의 열광에 휩싸인 아서는 재판 중에 변호사를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자기변호를 맡는다. TV에 생중계되는 재판에서 아서는 조커로 분장해 등장하며 재판을 조커의 토크쇼 무대로 만들어 군중의 환호를 받는다. 조커는 법봉으로 판사의 머리를 박살 내고 재판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망상에 빠진다. 재판장의 맨 앞에 앉아있는 할리 퀸과 재판장 밖에서 환호하는 군중들의 바람을 조커는 망상 속에서 해결한 것이다.
모두에게 괄시받고 무시당하고 있을 때 그를 이해하고 감싸주어 괴로운 현실을 잊게 해주었던 같은 빌라에 살던 여인 소피, 왜소증을 앓고 있어 동병상련을 느끼며 친절하게 대해주던 직장 동료 개리가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조커의 잘못을 증언한다. 이를 들으면서 아서는 자신의 조커 본성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재판장에서는 스스로 변호사가 되어 의기양양했지만, 재판을 마치고 돌아간 감방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실은 간수들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벌레처럼 짓이겨지는 초라한 죄수의 모습이었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아서는 이어진 재판에서 “조커는 없다”고 스스로 조커를 부정한다. 그러자 할리 퀸은 아서에게 등을 보이며 미련없이 재판장을 나가버린다. 할리 퀸은 1편의 그 인상적인 계단에서 아서를 다시 만나지만 광기어린 조커가 아니라 폭도에게서 도망쳐 온 소시민 아서를 냉정하게 외면하고 떠나버린다.
영화는 어려웠다. 이해가 될 듯 말듯 뭔가 아리송한 느낌의 여운이 남았다. 전문가의 평론을 읽고 나서 한두 번 다시 봐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1편을 보면서는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로부터 멸시를 당한 아서가 살인을 저질러 대중의 추앙을 받는 모습은 무정부 사회의 도래를 경고하는 듯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방치와 빈부격차,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의 말로를 보여줌으로써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했었다. 그러나 2편은 기대했던 이런 메시지의 반복이 아니었다. 대중이 원하는 더 과격하고 더 파괴적인 조커의 반사회성은 아서의 망상 속에서만 존재했고, 할리 퀸이 주도하는 뮤지컬이란 무대에서만 존재했다.
세상을 향한 조커와 할리 퀸의 통렬한 복수,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와 살인, 1편을 능가하는 기이한 악당 커플의 탄생, 이를 통한 긴장과 충격을 기대했을 관객들에게 조커는 재미없는 영화로 느껴졌을 것이다. 영화가 아서의 내면과 심리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조커의 존재가 할리 퀸과 군중의 요구 때문에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한 개인의 내면에서 사회적인 멸시와 천대로 인해 도출된 것인지 영화는 답을 주지 않고 막을 내렸다. 그래서인지 아서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조종 당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생각투성이인 나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