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준석은 혐오란 낙인에 저항했나, 혐오를 부추겼나

이준석은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를 벗어나야 한다.

by 배훈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4월 21일 오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1년여 만에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재개했다. 일부 참가자가 열차 탑승을 시도하면서 승강장이 혼란에 빠졌고, 열차 출발도 지연됐다. 전장연은 지난해 4월 이후 평화적인 방식으로 장애인 권리 입법을 촉구해 왔지만 정부의 응답이 없자, 다시 지하철 탑승 시위를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보도가 나오자,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기다렸다는 듯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그는 자신이 지난 3년간 전장연 시위를 공개적으로 언급해 온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주장하며, 침묵하는 정치인들을 “표가 두려운 비겁한 자들”로 규정했다.


이어 그는 전장연의 시위를 “공공을 인질로 삼은 인질극”이라 강하게 비난했고, “이 부조리에 침묵하는 자들이 대통령을 한다면 대한민국을 제대로 이끌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통해 자신을 용기 있는 지도자로 포장했다.



■ 왜 이준석에 대한 지지는 번번이 멈추는가

이준석이 반공 좌파에 불과한 가짜 보수 정치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하며, 그의 정책에 많은 부분 공감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그의 차별적 시각과 행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라고 여겨, 쉽게 지지를 표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6월 조기대선을 앞두고는 이준석과 개혁신당이 만들어내는 신선한 바람에 일정한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장애인 시위를 두고 그가 내놓은 발언과 태도는 정치 지도자로서 매우 부적절하며 실망스럽다. 그는 시민들이 느끼는 불편과 피로를 이용해 장애인 시위를 정략적으로 공격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부각하려 했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이를 이용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태도는 지도자의 자격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준석은 전장연의 시위를 두고 “공공을 인질로 삼은 투쟁은 연대가 아니라 인질극입니다”라고 규정했다. 시위에 대한 그의 인식은 놀라울 만큼 천박하다. 만약 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공공의 일상에 불편을 초래하는 모든 시위는 ‘인질극’이 된다. 노동자 파업도, 기후운동도, 여성운동도 모두 ‘공공에 대한 테러’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발언이다.


■ 불편을 설명해야 할 정치인이 불편에 편승하다니

시위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편을 만든다. 출근길 시민들이 느끼는 피로와 짜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불편이 있다고 해서 정치인이 나서서 시민들의 분노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시위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바꿀지 말지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정치 지도자는 오히려 이런 시위를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정치적인 비용이라고 설명할 책임이 있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시민이 불편을 겪게 된 데 대해 미안해하면서도, 그 불편을 감내하는 일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임을 설득해야 한다.

이런 역할을 정치인이 제대로 할 때 민주주의는 성숙할 수 있다. 하지만 이준석은 그 반대 길을 택했다. 그는 시민의 불편한 감정을 이용해 지지자들의 분노를 끌어모았고,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이 옳은 정치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 낙인찍기식 PC주의인가, 포퓰리즘적 PC주의인가

이준석은 자신을 '갈라치기'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이야말로 ‘낙인찍기식 PC주의’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이준석 자신이야말로 대중의 불편과 감정에 기대는 ‘포퓰리즘적 PC주의’에 빠져 있다.

기존의 정치적 올바름이 소수자의 감정과 상처에 과도하게 반응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면, 이준석은 다수 시민의 불편과 분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면서 똑같은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그는 장애인 시위에 불편을 느끼는 시민들의 감정을 앞세워 시위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그 틈을 타 자신을 더 합리적이고 정당한 정치인으로 포장한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감정에 기대 정치적 정당성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PC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불편을 겪은 시민의 감정 표현과 정치 지도자의 발언은 전혀 다른 영향을 낳는다.

유력 정치인의 말 한마디는 시위 현장에서 장애인을 향한 욕설과 물리적 위협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그런 행동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는 지하철 탑승 시위 중인 장애인들을 향해 서슴없이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심지어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일조차 더는 터부시되지 않는다.

유력 정치인의 역할이란 바로 이러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일은 반복되고 있다. 이준석은 자신의 발언이 어떤 파장을 낳을지 성찰해야 한다. 정치 지도자의 말은 사회적 정서를 움직이고, 혐오와 차별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분노한 시민들에게 ‘왜 화를 내도 되는지’에 대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전장연의 투쟁 방식은 오히려 그의 프레임 속에서 더 극단적으로 비치고 있다.


■ 이준석은 ‘PC주의’를 비판하며, 가장 정교한 낙인을 찍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는 다수의 동의로 시작된 적이 없다.

언제나 그들의 투쟁과 희생이 먼저였고, 그로 인해 사회는 변화해 왔다. 역사 속에서 다수와 지배층이 허용하는 범위에 갇혀 있던 권리는 결코 인권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여성의 참정권, 흑인의 민권, 노동자의 8시간 노동제 모두 소수의 끈질긴 저항과 사회적 마찰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 과정은 늘 누군가에게는 불편했고, 누군가에게는 거슬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다수의 삶을 더 넓히는 변화로 이어졌다. ‘불편하지 않게 말하라’는 요구는 결국 말하지 말라는 뜻이며, 그것은 곧 지배의 언어다. 이준석은 지금 그 언어를 가장 세련되고 교묘하게 구사하고 있다.

이준석은 스스로를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정치인’으로 포장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편향이며, 불편을 넘어 혐오를 부추기는 언어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다수 정서에 맞는 선’ 안에 가두려는 태도는 결국 지배 구조에 순응하는 폭력일 뿐이다.

그는 ‘낙인찍기식 PC주의’를 비판하지만, 정작 누구보다 정교하게 낙인을 찍고 혐오를 조직하고 있다. 자신의 언어가 불러올 결과를 외면한 채,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고, 시위로 인한 시민의 피로를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이 태도는 정치가 아니다. 선동에 가깝다.



■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지지자의 부탁

이준석의 글에 한 시민이 댓글을 남겼다.

“여의도에 출근하려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버스는 만원이라 탈 수 없고, 지하철도 이용할 수 없으며, 장콜도 부족한 상황에서 매일같이 출퇴근 지옥을 겪고 있다면 어떻겠느냐”라고 묻고, “이 의원님은 정치인이 아니냐. 왜 같은 잣대로 비장애인 편에 서서 갈라 치기를 주도하느냐”라고 되물었다. 이어 “시위 방식보다, 그들이 겪는 차별과 불편을 먼저 헤아려야 하지 않겠느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라고 말했다.

이준석은 젊고 영민하며, 정치적 감각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제 일부 열성 지지층의 박수에만 기대 정치를 이어갈 위치에 있지 않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상, 더 넓은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갈라 치기’라는 비판에 “갈라 치기가 아니다”라고 강변하면서, 실제로는 그 갈라 치기를 더 깊게 만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열성 지지자들의 환호에만 기대기보다는, 통합과 배려를 바라는 많은 시민들의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 정치 지도자라면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가진 무게를 알고, 그 발언이 만들어낼 파장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 책임을 끝내 외면한다면, 그는 더 이상 정치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분열과 혐오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이 사회를 이끌 수 없다. 지금처럼 분노를 정치의 연료로 삼는다면, 그가 정계를 떠나는 것이 오히려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더 나은 길이 될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