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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칼럼 비판

편향된 이분법이 정말 이념의 철저성인가?

by 배훈천

� 누더기 이념, 정체성의 혼란


최진석 교수는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이 중심」이라는 제목의 중앙일보 칼럼에서, 좌파와 우파 모두가 대한민국의 정체성 앞에서 이념적 혼란을 보이고 있다고 강하게 질타한다. 그는 '소위 좌파'와 '소위 우파' 모두에게 이념적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한다.

입신양명을 위해 이념을 누더기처럼 걸치는 정치풍조가 만연한 현실에서, 그의 지적은 날카롭다. 특히 입법권력을 장악한 제1야당에서 제왕적 총수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의 정체성을 ‘보수’로 규정한 발언은 최 교수가 지적한 ‘이념적 철저성이 전혀 없는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칼럼은 다양한 이념과 사상을 좌파와 우파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화한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좌파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고, 우파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다. 그러나 최진석 교수는 마치 친북 좌파만이 유일한 좌파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으며, 반공 좌파를 마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우파인 양 착각하고 있다.

그는 칼럼에서 ‘이름 붙이기’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정작 좌파와 우파라는 가장 기초적인 이름 붙이기부터 왜곡하고 있는 셈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를 ‘소위’로 규정하면서도, 글의 초점은 결국 좌파를 향한 일방적 비판으로 수렴된다. 북한 인권, 신영복, 정율성, 사노맹 등 제시된 사례들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각각 고유한 맥락과 복합적 쟁점을 안고 있음에도, 모두 ‘소위 좌파’를 대한민국에 반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기 위한 근거로만 제시된다. 이는 마치 포스터만 보고 영화를 평론하는 것과 같은 접근이다. 이런 방식은 균형 잡힌 분석이라기보다 정치적 낙인에 가깝다.


� 흑백 구도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 같은 정치적 해석의 단선화는 외교·안보 문제에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핵 문제다.
최 교수는 ‘소위 좌파’가 반핵을 주장하면서도 북한 핵에는 침묵하거나 오히려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좌파의 이율배반성을 비판하는 취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핵에 대한 태도는 전략적 판단과 외교적 고려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북핵 문제를 단지 특정 진영이 핵 개발을 도왔다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북핵은 미국의 전략 변화, 중국·러시아의 역할, 북한 내부 체제의 구조적 요인 등이 맞물린 복합적 사안이다.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이념적 구도로만 해석하면 현실을 놓치기 쉽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의 강경 일변도 대북 고립 정책은 북한과 러시아의 유착을 심화시켰고, 북핵 위협은 더욱 노골화됐다. 북핵 대응은 외교·안보·전략이 교차하는 영역으로, 정파적 공격의 수단이 아니라 세심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문제다.

인권 문제 역시 단선적으로 다룰 수 없다. 좌파가 인권을 중시하면서도 북한 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태도를 ‘종북’이나 ‘반대한민국’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다. 실제로 그런 성향이 일부 존재하지만, 북한 인권을 정치 쟁점화하는 것이 오히려 현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다. 일부 반공 성향의 좌파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정치적으로 극대화하는 것과 달리, 이를 의도적으로 자제하는 태도 또한 존재한다. 북한 인권 문제를 정쟁의 수단으로 소비하는 것은 오히려 북한 내부의 인권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먼 미래의 인권을 위해 현재 북한 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방식이 과연 정의로운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규정은 문제 해결보다 오히려 해결의 가능성을 좁히는 결과를 낳는다.

인물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정율성 기념 논란이나 신영복 서체 사용 문제는 단순히 좌우 구도로 나눌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 등 우파 인물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찬양하거나 매장하는 이분법적 태도가 아니라, 시대적 공과를 균형 있게 검토하고 현실에 맞게 실용적으로 활용하려는 접근이 필요하다. 이들 인물 한 명 한 명은 단순히 영웅이거나 악인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존재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사회에 어떤 의미로 작동하느냐는 실용적 판단이다. 그러나 최 교수의 시각은 이러한 흐름을 소비적인 인물 선호 논쟁으로 되돌린다. 그 결과, 갈등은 깊어지고 생산적 논의는 실종된다.

중립을 무기력하거나 사악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위험하다. 민주주의에서 중립은 균형을 위한 장치이자, 때로는 사회적 신뢰를 지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게 되면, 모든 정치적 태도는 곧바로 적대적 진영 싸움으로 환원되고 만다.


� 이념은 다양성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정체성을 바로 세우자는 주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 진영만이 정통을 대표한다는 식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건강한 보수도, 철저한 이념도 아니다. 이념적 철저성이란 자기 입장을 정직하게 점검하고, 현실을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성찰의 태도다. 다원주의와 충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서 더욱 치열하게 다듬어질 수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에 필요한 것은 갈등을 부추기는 흑백 구도가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품고 토론할 수 있는 공적 기반이다. 이념적 철저성은 다원주의와 함께할 때 비로소 현실의 자양분이 된다.

저명한 동양철학자인 최진석 교수에게 기대됐던 것은 통합을 향한 철학적 메시지였다. 그러나 이번 칼럼은 이념의 정체성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며, 자칫 분열과 공격의 언어로 소비될 우려를 남긴다. 지금처럼 좌우의 극단이 충돌하는 시기일수록, 이념은 흑과 백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다원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다층적 이해 없이 선 긋기와 배제에 기댄 논리는 공동체를 파괴할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 짓기의 철학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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