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시그리드 누네즈)를 읽고
"어떻게 지내요"(시그리드 누네즈, 엘리)를 읽고
마지막 장면이 너무 고즈넉하게 끝나서 슬펐다. 소설 속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나도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나는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 다만 공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아니면 공감하는 척하거나. 대개의 경우 그저 본능에 가까울 뿐이다.
소설은 좋았다. 자기 고백의 글을 선호하므로 익숙했고, 산문처럼 편하게 읽었다. 작가로서의 재능을 맘껏 살린 문장들이랄까. 이야기 속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고양이 세헤라자드는 그가 아닌가. 다만 일인칭 화자가 주는 친근함은 몰입도가 높지만 다양한 주제의 확장이 산만하기도 했다.
작가는 '이웃에 대한 사랑, 친절, 관심'을 통해 기후와 환경, 반출산주의, 존엄사 등 사회문제를 언급하고 있었다. 나를 찾아와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화자처럼 나 또한 그가 갈 때 안도하며 그가 전해준 이야기로 글을 끼적였다. 아이를 낳지 않는 지인들을 떠올렸고,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한 친구도 생각났다. 소설 속 익명의 인물들은 결국 내 곁에 있는 사람들임이 각인되었다.
잠시 빌린 집의 호스트가 왜 울고 있지? 의아했는데 토론 중 한 분이 "그 사람도 고통받고 있는 거죠."라고 말해주었다. 누구나 고통받고 있다는 표시였구나. 'my favorite things'을 흥얼거려보았다. 이런 노랫말이 있다.
I simply remember my favorite things and then I don't feel so bad.
난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그러면 그렇게 슬프지 않아.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을 나는 모른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타인에 대한 이해는 어느 만큼 가능한가? 정말로 공감이 가능한가? 이길보라 씨는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삶을 지옥으로 만들지는 않겠다고 주억거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휴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고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시그리드 누네즈, "어떻게 지내요" p.166
20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