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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사의 아내가 나를 찾아왔다.

성수 씨의 만물상점 #7

by 김성수



어서 오세요, 성수 씨의 만물상점입니다.


오늘 꺼내놓을 이야기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상자 속에서 찾아낸, 제 첫 직장 시절의 '매운맛' 기억입니다. 이 이야기는 [처세술] 섹션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사회초년생이었던 제가,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비정한지 처음으로 목격했던 순간이거든요.


지금부터, 그 아찔했던 기억의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겠습니다.


스무 살 초반, 저의 첫 직장은 꽤 큰 중견기업이었습니다. 모든 게 서툴고 낯설었지만, 저는 그곳이 참 좋았습니다. 일은 고되었어도 좋은 선배들이 있었으니까요.


특히 영업팀 신 차장님은 사내 최고의 인기남이었습니다. 작은 체구였지만 유쾌한 입담과 따뜻한 성품으로 주변에 에너지를 주는 분이셨죠. 갓 입사한 병아리 사원이었던 저를 유독 딸처럼 아껴주셨을 때, 저는 그저 '아, 나는 인복도 많지'라며 마냥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 평온했던 일상은, 어느 날 예고 없이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보세요? 성수 씨죠? 저... 신 차장 와이프 되는 사람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분하고도 낯선 목소리.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차장님도 아니고 사모님이 왜 저에게?

"실례인 줄 알지만... 오늘 퇴근 후에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거절할 수 없는, 아니 거절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습니다. 내심 불안했지만, 저는 약속 장소로 향했습니다.


회사 근처의 고급 경양식 레스토랑. 사모님은 저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드셨습니다. 그녀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그곳에서 가장 비싼 요리를 주문해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로 제 칭찬을 늘어놓으셨죠. 남편에게 제 얘기를 많이 들었다, 새로 온 신입이 명랑해서 회사 분위기가 살았다더라...


하지만 접시 위에 놓인 스테이크가 줄어들수록, 제 목구멍은 점점 조여왔습니다. 이 과도한 친절과 비싼 음식. 이것은 본론을 꺼내기 위한 '화려한 밑밥'임이 분명했으니까요. 입안의 고기가 모래알처럼 느껴질 때쯤, 커피가 나왔고 마침내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저기... 성수 씨. 사실은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 네, 말씀하세요."

"그게... 신 차장님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같아서요."


저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대사가 제 눈앞에서 튀어나올 줄이야.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뒤엉켰습니다.'설마, 나를 의심하시는 건가? 아니야, 그랬다면 스테이크 대신 물 잔이 날아왔겠지. 그럼 대체 나한테 왜?'


그녀는 제 흔들리는 눈빛을 읽었는지, 다급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혹시, 회사로 찾아온 낯선 여자나... 의심스러운 전화 같은 거 없었나요?"


그땐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사무실 전화가 유일한 소통 창구였죠. 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거래처 전화 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고요.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아했던 사모님이 사람들 앞에서 소리 없이 흐느끼는 모습. 저는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부탁해요 성수 씨. 혹시라도 신 차장님에게 의심스러운 낌새가 보이면... 저에게만 살짝 알려줄 수 있어요? 같은 여자로서... 좀 도와줘요."


'같은 여자로서'라는 말이 그토록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스무 살초반의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겁고 위험한 부탁이었죠.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여기서 "네"라고 대답하는 순간, 저는 상사의 '감시자'가 되어 이 진흙탕 싸움의 공범이 된다는 것을요.


그날, 저는 저의 본능적인 직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신 차장님에게도,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날의 만남에 대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회초년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 '침묵'이었습니다. 다행히 부인에게서도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신 차장님을 대하는 제 마음에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가버렸습니다. 유쾌한 농담을 던지는 그분의 웃음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존경심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얼마 후 저는 다른 부서로 이동했고, 자연스럽게 그분과는 멀어졌습니다. 그렇게 그날의 기억은 덮이는 듯했습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지금도, 저는 가끔 그날의 레스토랑을 떠올립니다. 과연 그것은 남편을 너무 사랑한 아내의 서글픈 '의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제가 미처 몰랐던 '배신'이었을까요. 진실은 여전히 그들만의 몫입니다.


다만 저는 그날,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에는 함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진실'이 존재하며, 때로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철저한 침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여러분께도 한번 여쭤보고 싶네요. 만약, 사회초년생인 여러분 앞에 상사의 아내가 울며 찾아왔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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