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 씨의 만물상점 #8
어서 오세요, 성수 씨의 만물상점입니다.
오늘 진열장에서 꺼내볼 이야기는 제 인생에서 가장 기이하고도, (저만) 웃음보가 터진 어느 날 밤의 기록입니다. 첫아이를 키우던 시절, 아이가 아파 정신없이 달려갔던 대학병원 응급실. 그곳에서 저는 난데없이 조폭 영화의 한복판에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지금부터, 긴박했지만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날 밤의 해프닝을 공개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8개월 무렵의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곤히 자던 아이 몸이 불덩이 같았죠. 체온계는 40도를 가리키고 있었고, 초보 엄마 아빠였던 저와 남편은 그야말로 '멘붕'이었습니다. 저희는 아이를 둘러업고, 시어머님과 함께 무작정 대학병원 응급실로 내달렸습니다.
남편이 분주하게 수속을 밟는 동안, 저는 시어머님과 나란히 대기실 의자에 앉아 아이를 살폈습니다. 다행히 병원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아이는 어머님 품에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죠.
잠시 숨을 고르며 응급실의 적막이 흐르던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자동문이 거칠게 열리며 119 구급대원들이 한 남자를 싣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마치 영화감독의 '큐' 사인이라도 떨어진 듯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외쳤습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형님!"
세상에, 깍두기 머리에 금목걸이, 곰만 한 덩치를 가진 남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90도로 굽히는 장관이라니. 다행히 침대에 누운 '형님'이라는 분은 의식이 멀쩡했습니다.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죠.
"아, 괜찮아.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들 해."
저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영화 <조폭 마누라>나 <범죄와의 전쟁>의 한 장면이 눈앞에서 라이브로 펼쳐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더 웃긴 포인트는, 그 '형님'들의 태도였습니다. 영화에선 보통 의사 멱살을 잡고 난동을 부리잖아요? 하지만 현실 조폭들은 생각보다 너무 '젠틀'했습니다. 가장 덩치가 큰, 아마도 행동대장쯤 되어 보이는 분이 의사 선생님께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물었죠.
"선생님, 우리 형님... 많이 다치신 겁니까?"
의사 선생님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응급실에 울려 퍼졌습니다.
"네, 의식도 명료하시고... 다행히 폐를 비껴서 자상을 입으신 듯싶네요. 치명상은 아닙니다. 응급수술 요청해 놨으니 기다리세요."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자상'? '치명상'?
살면서 뉴스나 영화에서나 듣던 단어들이 눈앞에서 오가는데, 정작 당사자인 형님은 "거 봐, 별거 아니랬잖아" 하며 태연하게 누워 계신 상황. 사람이 죽을 만큼 위독했다면 저도 공포에 떨었겠지만, 이건 뭐랄까요. 너무나 완벽하게 짜인 B급 코미디 영화의 클리셰 같았습니다.
그 비현실적인 상황이 주는 부조화에, 저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풉... 아, 진짜 영화랑 똑같네. 하하하."
제가 웃자, 옆에 계시던 어머님이 기겁하며 제 옆구리를 쿡 찌르셨습니다.
"얘가 왜 이래! 조용히 좀 해"
어머님은 매우 당황해하셨지만, 이미 터져 나온 제 웃음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듯 멈추질 않았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스펙터클 해졌습니다. 행동대장쯤 되는 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비장하게 외쳤습니다. "성철아, 형님 큰일 났다. 상대파 놈들하고 시비 붙어서 칼 맞았어. 애들 다 모아!"
채 10분도 되지 않아, 수십 명의 검은 정장 무리가 응급실 로비와 병원 주차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수속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웃으며 속삭였습니다.
"여보, 이거 봐. 너무 웃기지 않아? 완전 코믹 누아르 영화야."
남편은 '제발 눈치껏 행동해'라는는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대고 필사적인 눈짓을 보낼 뿐이었죠.
다행히 아이는 수액을 맞고 금방 열이 내렸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를 안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도, 수십 명의 '그분'들이 쫙 깔려 형님의 쾌유를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차에 타자마자, 안도하신 어머님께서 등짝 스매싱과 함께 한 소리를 하셨습니다. "너는 겁도 없니? 나는 무서워서 혼났는데, 그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아니, 의사 선생님이 치명상이 아니라고 했는데, 자기들끼리 너무 진지한 게 꼭 코미디 같아서 그랬죠. 저만 웃겼나요?"
"그 사람들이 너 쳐다볼까 봐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아니!"
글쎄요. 제가 정말 겁이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그냥 웃음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던 걸까요.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살벌했던 새벽의 응급실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기이하고도 엉뚱했던, 한 편의 '리얼 버라이어티 조폭 코미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