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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냉면 연대기(年代記)

갑자기, 냉면 맛집 소개

by 김성수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 같은 음식이 냉면이라지만, 나의 냉면 사랑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에도, 뜨끈한 온육수와 함께 즐기는 냉면 한 그릇은 더없이 소중한 행복을 안겨준다. 수많은 음식 중에서도 냉면은 그렇게 내 마음속 가장 윗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사랑이 깊은 만큼, 나만의 확고한 철학도 있다. 시원하고 깊은 육수가 일품인 물냉면은 마땅히 평양냉면이어야 하고, 매콤한 양념장으로 입맛을 돋우는 비빔냉면은 쫄깃한 함흥냉면이어야 한다는 것. 면 또한 순수한 메밀의 풍미가 살아 있는 것만을 고집하기에, 칡이나 녹차를 섞은 면은 나의 선택지에 없다.


이토록 유별난 애정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리 집 외식 메뉴는 짜장면이나 고기보다 냉면일 때가 더 많았다. 냉면을 유난히 좋아하셨던 아버지 덕분이다. 지금처럼 이름난 맛집을 찾아다니진 못했지만, 그 시절에도 냉면은 아이에게 꽤 비싼 음식으로 기억된다.


영등포사거리에 있던, 지금은 사라진 추억 속 분식집이 떠오른다. 냄비가락국수부터 비빔밥까지 팔던 그곳에서 어머니는 늘 뜨끈한 국수를,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남동생은 어김없이 냉면을 택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그 소박한 식당은 우리 가족에게 세상 어떤 유명 맛집 못지않은 최고의 공간이었다. 이렇듯 나에게 냉면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넘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따뜻했던 가족의 사랑이 오롯이 담긴 상징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 이제 제 발로 이름난 냉면집들을 찾아다닌다. 평양냉면은 을밀대, 우래옥, 필동면옥이, 함흥냉면은 오장동함흥냉면과 영등포함흥냉면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평양냉면은 을밀대를, 함흥냉면은 영등포함흥냉면을 가장 아낀다.


하지만 이 목록에 없는, 나만 알고 싶었던 보석 같은 곳이 있었다. 독산동의 ‘진영면옥’. 우연히 고수의 풍모가 느껴지는 외관에 이끌려 들어간 후, 깊으면서도 담백한 평양냉면의 정수에 단번에 반해버렸다. 그렇게 나만의 행복을 누리던 어느 날, 한 유명 가수의 유튜브에 소개되더니 이제는 작정하고 나서야 할 만큼 긴 기다림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마치 나만의 아지트를 잃은 듯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최근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영등포함흥냉면마저 그 채널에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그곳마저 마음 편히 드나들기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맛집을 향한 나의 이중적인 마음과 마주하게 된다.


정성 가득한 사장님의 음식이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북적이는 인파와 길어진 대기 줄에 내가 사랑했던 공간의 아늑함을 잃을까 봐, 정작 내가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하게 될까 봐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어쩌면 이 달콤한 이기심의 근원은 단순히 ‘맛’을 넘어선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맛있는 음식이란 단순히 입맛에 맞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 음식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온기’ 때문이다. 그 식당의 문을 여는 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 나의 행복했던 한때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결국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맛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고스란히 박제된 나의 소중한 추억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북적일 걱정, 기다릴 걱정은 잠시 잊기로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냉면 한 그릇 해야겠다. 나의 가장 오래된 냉면의 추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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