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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판알과 피아노 건반

다정한 아이러니

by 김성수

나의 국민학교 시절, 80년대 국민학생이었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이었기에, 아니 그 시절 대부분의 집이 지금처럼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는 않았다. 조금 사는 집들만 아이를 학원에 보내곤 했다.

지금처럼 학원이 다양하지도 않았고, 다닐 형편도 되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동네 골목이나 놀이터에 무리 지어 모였다. 저녁밥 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혹은 해가 저물고 지칠 때까지 놀다가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 부모님께서 장사를 시작하셨다. 자연스레 돌봄에 공백이 생겼고,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조금 생겨서였을까. 부모님은 우리를 학원에 보내기로 하셨다.

나는 여자아이들의 로망인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피아노나 미술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셨던 모양이다. 주산을 배워두면 나중에 은행원 같은 직업을 갖거나 회사 생활을 할 때 도움이 될 거라는 게 부모님의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도 나름의 고민이 있으셨을 것이다. 막 시작한 장사가 언제까지 잘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는 확실한 '실용성'을 선물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당신들이 경험한 궁핍함을 자식들만큼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다.


결국 두 살 아래 동생과 나는 원치 않던 주산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학원에 처음 가던 날, 나는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에게 자랑 반, 엄살 반으로 말했다."나 오늘 못 놀 것 같아. 학원 가야 돼."

친구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와, 부럽다! 학원 다녀?" "에고, 놀지도 못하고 힘들겠다."

사실 내 마음도 딱 그 두 가지였다. 친구들은 다니지 못하는 학원에 다닌다는 약간의 우월감.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한다는 서운함.


동생 손을 잡고 학원에 가던 첫날, 모든 것이 낯설고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 친절한 선생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처음 몇 달은 제법 재미있었다. 주산을 배우니 암산 실력이 쑥쑥 늘어, 간단한 계산은 다른 친구들보다 월등히 잘하게 되었다.


주산 학원에서의 나날이 익숙해질 무렵, 같은 학원에 다니던 친구 하나가 내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그 친구는 주산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곤 했다.

"성수야, 이따 우리 피아노 학원에 놀러 갈래? 선생님이 친구 데려와도 괜찮다고 하셨어."

반가운 마음에 망설일 틈도 없이 대답했다. "정말? 안 그래도 가보고 싶었는데!"

친구의 손에 이끌려 들어선 피아노 학원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닫힌 방문 틈새로 서툴지만 맑은 피아노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복도를 따라 늘어선 작은 방들마다 검고 반짝이는 피아노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주판알 튕기는 소리만 가득하던 곳에서 온 내게는 마치 신세계처럼 느껴졌다.


친구가 나를 젊고 예쁜 피아노 선생님께 소개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랑 같이 주산 학원 다니는 친구예요." 나는 수줍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미숙이 친구예요"

선생님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쩌면 그 상냥한 미소 뒤에 미래의 수강생을 알아보려는 예리함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게 뜻밖의 질문들을 던졌다.


"너는 학원 어디 어디 다녀?" "저는 주산 학원만 다녀요.""부모님은 뭐 하셔?" "아빠는 회사 다니시고, 엄마는 액세서리 가게 하세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구나. 너도 피아노 배워 볼 생각 없어? 내가 조금 가르쳐 줄 테니, 재미있으면 부모님께 피아노 학원 보내달라고 한번 말씀드려 봐."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내게 피아노의 기초를 알려주었다. 난생처음으로 눌러본 건반의 묵직한 감촉.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이름을 배우고, 서툰 손가락으로 '도레, 도레'를 반복해 짚어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손끝에서 음악이 피어나는 듯한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날 밤, 나는 들뜬 마음으로 부모님을 졸랐다. 하지만 부모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피아노 학원비가 주산 학원비보다 훨씬 비싸다는 현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집에 피아노가 없어 배워도 소용없다는 논리 앞에 내 짧은 꿈은 허무하게 꺾였다.


아마도 부모님 마음도 편치 않으셨을 것이다. 딸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말이다. 하지만 당장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피아노는 너무 큰 사치였을 테다.


그날 이후, 내게 주판은 더 이상 신기한 계산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검은 피아노 건반의 잔상일 뿐이었다. 주판알을 튕기는 손끝이 무겁게 느껴졌고, 흥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결국 나는 2년간 의무처럼 다니던 주산 학원에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냈다.

닿을 수 없는 꿈을 엿본 아이의 작은 반항이었을까. 그것이 나의 국민학교 시절, 피아노에 대한 짧고도 아련한 추억이다.



그 후의 이야기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경력 단절의 시기, 2000년대 중반이었다. 어느 날, “주산이 아이들 두뇌 계발에 좋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주산 교육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숙명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주산활용교육사’ 과정을 수료했고, 결국 주산 강사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판단은, 어쩌면 옳았다. 피아노를 향한 내 꿈은 멈췄지만, 그 대신 주판알은 나의 또 다른 삶을 열어주었다.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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