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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찾아온 오십춘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by 김성수

학창 시절, 친구들이 배우나 가수의 브로마이드를 모으고 팬클럽 활동을 하고, 공개방송을 쫓아다닐 때도 나는 무던했다. 물론 연예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열정적으로 덕질(?)을 하지 않았을 뿐 성인이 되어서도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 하긴 했지만, 배우들에 대한 감정은 연기 잘하는 배우면 좋지 정도? 어쩌면 조금은 무미건조했을지도 모를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말이지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멈춘 어떤 드라마 속 한 배우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아니, 시선이 아니라 마음을 통째로 빼앗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벼락처럼 찾아온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당혹감이 앞섰다. 그의 연기, 눈빛, 목소리 하나하나가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그 후 약 3개월 정도, 나는 난생처음 ‘덕질’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의 지난 작품들을 찾아보고, 관련 기사를 검색하고, 팬들이 만든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순수한 열정이 다시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십 대 시절에도 겪어보지 못했던 열병 같은 몰입이었다. 그러다 문득, ‘팬클럽에 가입해 볼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번 ‘정신 차리자,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하는 자문이 고개를 들었다. 이 나이에, 이게 맞는 걸까?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던 것일까. 사춘기도 아니고 ‘오십춘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혼자 끙끙 앓던 마음을 용기 내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뜻밖에도 친구는 내 고백에 웃으며 화답했다. “나도 요즘 모 배우 덕질 하잖아!”

친구 역시 뒤늦게 ‘덕질’의 세계에 입문했다며 ‘덕밍아웃’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가 좋아하는 배우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의 매력 포인트, 인상 깊었던 장면, 심지어 사소한 습관까지.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우리 사이에서는 더없이 진지하고 즐거운 대화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우리는 ‘나이에 맞게’, ‘어른스럽게’라는 보이지 않는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고, 설레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너무 인색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팬클럽 가입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설렘과 열정은 잠자고 있던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워주었고, 친구와의 솔직한 대화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과 함께, 스스로 씌웠던 제약을 조금이나마 벗어던질 용기를 주었다.


‘오십춘기’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즐거움과 설렘을 더 이상 외면하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래간만에 느껴본 이 두근거림, 꽤 괜찮은 경험이었다고, 그렇게 조용히 주절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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