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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

by 김성수

어느덧 반백의 나이를 맞이했다. 살아온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기억의 층계들을 오르내리다 보면, 문득 오래전 인연들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얼굴과 추억들.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야속하게도 그들의 이름은 안개처럼 희미하게 가물거린다.


사실 나는 타인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곰곰이 되짚어보아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기억력 감퇴를 탓하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보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마음 한편을 맴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름은 잊었을지언정,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선명한 빛깔을 잃지 않은 채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보듯,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것이다. 함께 들었던 음악의 선율이 흐르면, 그 시절 함께 웃고 떠들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함께 거닐었던 길을 걷다 보면, 그날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때로는 짧지만 강렬했던 대화 한마디가 뇌리를 스치며, 그 시절의 감정을 고스란히 되살려내기도 한다.


그렇게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인연들은 어느새 내 삶의 한 조각이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끈끈한 정을 이어온 인연도 소중하지만,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연 또한 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름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남긴 따스한 기억일 테니까.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지인과의 통화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잊고 지냈던 지난날의 추억들이 방울방울 떠오르며, 가슴 한편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기분이다. 문득 이 모든 인연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또 어떤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게 될까. 그리고 그 인연들은 내 삶에 어떤 빛깔을 더해줄까. 설렘과 기대가 교차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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