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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외로운 가을

왜? 외로움을 느낄까?

by 김성수

가을이 내게 와 속삭인다


"가을이 되니 왜 이렇게 외로운지 모르겠어."

친구의 메시지가 휴대폰 화면을 밝혔다. 창밖으로는 단풍이 한창이었고,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들이 마치 시간의 편지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가을은 왜 이토록 외로운 걸까?


사람들은 가을만 되면 으레 외롭다고 말한다. 마치 정해진 수순인 것처럼. 하지만 이 외로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유독 가을에만 이런 감정이 밀려오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나는 창가에 앉아 물드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가을의 비밀을 찾아보기로 했다.


완성과 상실 사이


가을은 완성의 계절이다. 봄에 품었던 희망의 씨앗들이 여름의 뜨거운 성장을 거쳐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사과나무는 붉은 사과로 가득하고, 벼는 황금빛 이삭을 드리운다. 모든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다. 가장 완벽한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때에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왜일까?

답은 완성 그 자체에 있다. 완성은 동시에 끝을 의미한다. 더 이상 자랄 수 없고,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다. 목표에 도달한 순간, 우리는 다음을 향한 공허감을 마주하게 된다. 가을의 외로움은 바로 이 완성 이후의 침묵, 성취 다음에 오는 정적에서 비롯된다.


내어줌의 철학


하지만 가을의 외로움에는 더 깊은 차원이 있다. 나무는 자신이 일 년 내내 정성스럽게 키워낸 열매를 망설임 없이 세상에 내어준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만든 작품을, 자신의 생명력으로 빚어낸 결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떨어뜨린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의 섭리가 아니다. 가장 고귀한 철학적 행위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에 내어주는 것, 그것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부모의 마음,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지식을 아낌없이 전하는 스승의 마음과 같다.


비움의 아름다움


모든 것을 내어준 후 남는 것은 무엇인가? 텅 빈 가지들, 앙상한 실루엣, 적막한 들판. 겉보기에는 쓸쓸하고 황량해 보인다. 하지만 이 비움이야말로 가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무(無)'의 경지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것을 다 내어준 후에 도달하는 완전한 비움. 이는 가진 것이 없어서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기에 비어있는 것이다. 결핍의 공허함이 아니라 완성의 공허함이다.


외로움의 품격


그래서 가을의 외로움은 다르다. 봄의 설렘도, 여름의 활기도 없다. 하지만 이 외로움에는 깊이가 있다. 모든 것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이루어내고, 모든 것을 내어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귀한 외로움이다.


이는 마치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여행자의 마음과 같다. 세상의 모든 풍경을 보았지만, 이제는 고요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그 모든 경험을 곱씹어볼 시간이 필요하다. 가을의 외로움도 그렇다. 1년이라는 긴 여행을 마친 자연이, 그리고 그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성찰의 시간이다.


눈부신 고독


가을 오후, 창가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외롭다. 하지만 이제 이 외로움의 정체를 안다. 이것은 부족해서 오는 외로움이 아니라 충만해서 오는 외로움이다.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나서 마주하게 되는 고요함이다.


가을이 내게 와 속삭인다.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아련하다고.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눈부신 것인지를. 온 생명을 다해 사랑하고, 창조하고, 내어준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숭고한 경지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가을을 살아간다. 꿈꾸고, 노력하고, 이루어내고, 내어주는 삶의 순환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모든 것을 다 내어준 후의 그 고요한 외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가을의 외로움은 결핍이 아니라 완성이고, 상실이 아니라 성취이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다. 그래서 가을은 눈부시게 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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