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오랜만에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에 “그래! 이게 가을이지” 찜통 같았던 하루는 금세 잊은 채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는 희망 풍선을 띄운다. 부랴부랴 저녁을 준비하여 먹고 집안 채비를 하고 나니 어느새 9시가 넘었다.
불현듯 퇴근길 바람이 떠올랐다.
누군가 애타게 불러서 나가는 사람처럼 현관문으로 향한다. 빼꼼히 열린 현관문 사이로 가로등에 비치는 나무들이 먼저 반긴다. 아파트 1층만이 가진 매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기대에 벅찬 설렘이 그대로 목적지까지 연결되는 기쁨을 만끽하며 엘리베이터로 인한 어떠한 감정의 손실 없이 우리 동 바로 앞에 있는 쉼터로 향한다. 자동문이 열리자 나는 잠깐 멈춰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며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벤치와 눈 맞추고 애인을 만나러 가듯 벤치를 향해 걷는다.
고요한 가을밤의 초대는 소소했지만, 분위기만큼은 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 손색이 없었다. 인적이 드문 시간인지라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긴 의자에 몸을 눕히고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며 눈을 감는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몸 안으로 끌어당기며 기도한다. 나는 비록 연약하여 오늘도 내 안의 나와 치열하게 싸우며 세상 앞에 쓰러지고 넘어지며 찢기고 마음 상했지만 비굴하게 비겁하게 무릎 꿇지 않겠습니다. 들이마셨던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며 나를 나답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뱉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