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질인 자주성은 인간에게 아주 중요하고 물론 아이들에게도 필요하고 교육받아야 한다고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교적 어른인 강자가 아이라는 약자에게 그 자주성을 교묘하게 무너뜨리는 행위.
우리 아이가 우리 아이를 괴롭힌 선생님에게 받은 언행들은 가스라이팅에 걸맞았다고 생각이 든다.
피해자에게 심각한 심리적 영향을 미쳐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판단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는 선생님의 학대로 힘들었고 힘들어만 하다 그 어린이집을 퇴소했고 새로운 기관으로 옮겨갔다.
거리가 꽤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아는 분의 추천으로 새로운 곳에 새롭게 등원했다.
새로운 기관에 가는 데에 나는 신경이 이 전보다 많이 쓰였다.
아이가 이제는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무서운 존재라고 인식하는 듯한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상담을 가면서도 '엄마, 여기는 무서운 선생님 없어?', '엄마, 여기는 밥 다 안 먹어도 된데?'라는 질문을 던졌고, 당연하다는 대답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은 부모인 나에게도 트라우마로 작용해 불안했다.
하지만 우리는 멈추어있을 수가 없었고 그전과는 다르게 평범한 선생님을 만나 자신감을 다시 찾고 잘 적응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었다. 나는 아이가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하는지에 한동안 집중했다.
다행히 새로운 선생님은 우리 아이나 다른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사실 처음엔 어른을 경계하는 것 같아서 새로운 선생님도 우리 아이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도 그 경계는 점차 누그러졌고 아이가 새로 만난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아이는 이 전에 익숙해있던 본인을 괴롭힌 선생님에 대한 객관화가 이제야 되는 것 같았다.
아동학대를 행한 장면이 나온 영상이나 경찰에서 정리한 범죄 일람표, 공소장에 기재되어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보면 그 선생님은 아이에게 악의를 지능적으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서서히 아이의 마음을 편하게 두지 않았다.
'네가 잘못해서 혼나는 거야'는 밥을 다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꾸준히 세뇌되었고,
서서히 모든 우리 아이가 하는 행위에 대해 적용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잘못되어 혼난 거야'라고 세뇌당한 결과가 엄마, 아빠에게 알리지 않았고 알리면 똑같이 '내가 잘못되었으니 혼날 거야'라는 결론에 초래했다.
분하게도 나는 조금 더 일찍 선생님의 아동학대를 정확하게 눈치채지 못했고 의심만 한 기간이 길어져버렸고 그 사이 아이의 성질은 변해버렸다.
그리고 밥을 더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친절한 어른을 만나고 시간을 보내면서 본인을 괴롭힌 선생님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뜬금없이 “엄마 ooo(해당 선생님 실명) 악마지?”라고 한다던지, “엄마 나 그때 힘들었는데 왜 몰랐어?”라고 한다던지. 불쑥불쑥 뒤늦은 아이의 분노가 나타났다.
아이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이 전 선생님의 말과 행동이 잘못되었었다고 인지하기 시작한 뒤로는 감정을 참거나 억누르지 않으면서 감정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상당히 놀랬지만 놀란 티를 내지 않고 나는 악마가 맞다고 대답했다.
아이에게 어떤 좋은 말로 그 여자의 짓거리를 돌려 설명할 길이 없었고, 네가 겪은 일은 비상식적이고 악마 같은 사람이 행한 짓이라고 돌리지 않고 바른대로 말해주었다.
분명히 비난을 하고 분노의 표현을 아이의 언어로 하고 있는데도, 하나도 불쾌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에게 끝으로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가정에서 기본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매일 긴 시간 보내던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이렇게 괴롭혀서 아이의 분노, 변화는 수습은 왜 또 가정에서 해야 하는지!
일상에서 아이 입으로부터 이런 분노의 말이 나오고 있으니 더욱이 나는 속에서 아이에 대한 끝없는 미안함과 그 여자에 대해 불이 끓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들었다. 아이의 분노를.
듣고 또 듣고 계속 아이의 말에 동의했다.
언제 어디서든 불쑥 이야기해도 들었다.
그 뒤늦은 분노는 한동안 이어졌고, 우리 아이는 부모에게 그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공감받고 어느새 선생님이 본인에게 사과를 하면 만나고 싶다는 말까지 하는 때도 왔다.
한참을 화내다 구하지도 않는 용서를 받겠다는 아이.
부모가 들어준 것만으로도 선생님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를 버리고 사과를 받고 싶다는 아이인데, 안타깝게도 사과를 하는 선생님은 없었다.
언제 만나서 사과를 받을 수 있냐는 말에 나는 제대로 된 대답할 수 없었고 속으로 가엽은 우리 아이를 보며 원통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뒤늦은 아이의 정당화된 분노를 한참 듣고 나서 나는 끝없이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