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개의 질문 - 생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제1장 하늘의 질문, 살갗의 대답
2절. 최초의 질문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300만 년간 이어져 온 거대한 침묵에 처음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 아마도 동아프리카의 어느 햇볕 따가운 초원에서 시작되었을 이 불가사의하고도 조용한 혁명을, 훗날 학자들은 ‘인지 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 부르게 된다. 무엇이 이 혁명의 방아쇠를 당겼을까? 우리의 DNA 염기서열 어딘가에 숨어있던 유전자의 미스터리한 돌연변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목구멍 구조의 미세한 변화 덕분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면서, ‘언어’라는 놀라운 소통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을까? 혹독한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뇌가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일까?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인류학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될 한 영장류의 뇌 속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뇌의 크기 자체는 그들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네안데르탈인보다 오히려 약간 작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었다. 그 내부의 신경망 연결, 즉 뇌의 배선 구조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유연하게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마치 낡은 기계 부품을 교체한 것이 아니라, 운영체제 자체를 새로 설치한 것처럼.
이 새로운 뇌 운영체제는 인류에게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두 가지 놀라운 능력을 선물했다. 첫째는 ‘지금 여기’라는 감각의 감옥, 영원한 현재라는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 즉 시간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어제의 실패한 사냥을 복기하며 교훈을 얻고,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여 더 나은 사냥 경로를 계획하며, 심지어 자신이 죽은 후의 세상까지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는 눈에 보이는 사자나 들소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공유하는 능력이다. ‘부족의 수호신’, ‘강의 정령’, ‘죽은 조상의 영혼’ 같은 ‘허구(fiction)’를 창조하고, 그것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믿는 능력. 이것은 단순한 거짓말이나 망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수십, 수백 명의 낯선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접착제이자 거대한 동기 부여 장치였다.
이 두 가지 능력—시간을 넘나드는 상상력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이 마침내 하나로 결합되었을 때, 인류는 비로소 우리가 아는 의미에서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생존이라는 눈앞의 문제를 넘어선 질문들, 세계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를 향한 끝없는 탐구가 시작된 것이다.
장면을 옮겨보자.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4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뷔름 빙기)가 유럽 대륙을 거대한 얼음 방패로 뒤덮고 있던 혹독한 시절. 장소는 프랑스 남부의 어느 석회암 동굴 앞이다.
어둠은 완전한 어둠이 아니었다. 낮 동안 사냥한 순록의 지방을 태우며 춤추던 모닥불이 제 몸을 사그라뜨리며 붉은 잉걸불로 잦아들자, 세상의 나머지 절반을 채우고 있던 밤의 진짜 얼굴,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서늘한 위엄이 드러났다. 검다 못해 깊은 푸른빛이 감도는 밤하늘은, 마치 잘 연마된 흑요석으로 만든 거대한 돔처럼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누군가 무심하게, 그러나 더없이 찬란하게 뿌려놓은 다이아몬드 가루들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현대 도시의 인공적인 빛 공해에 눈이 멀어버린 우리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수십억 개의 별들이 은하수라는 거대한 빛의 강을 이루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숨 막히는 풍경이었다. 공기 중에는 타다 남은 마른 소나무 가지의 향긋한 냄새와 동굴 벽에서 스며 나오는 축축한 이끼 냄새, 그리고 동굴 깊은 곳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잠든 삼십여 명 동족들의 쿰쿰한 체취가 뒤섞여 있었다.
그날 밤도, ‘그’는 잠들지 못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동굴 밖 저편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동굴사자나 하이에나의 울음소리가 특별히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낮 동안, 눈 위에 찍힌 거대한 매머드의 발자국을 몇 시간이나 뒤쫓고, 얼어붙은 땅을 날카로운 돌로 파헤쳐 딱딱한 식물 뿌리를 캐내느라 온몸의 근육은 비명을 질렀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그의 고개를 들게 했다. 딱딱하고 축축한 동굴 천장이 아닌, 저 까마득하게 멀고 깊은 바깥의 천장을 향해.
그의 눈에 담긴 밤하늘은 어제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미묘하게 달랐다. 며칠 전, 저쪽 눈 덮인 산 능선 위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날카로운 손톱 모양의 초승달은, 어느새 잘 벼린 사냥꾼의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반달이 되어 반대편 하늘로 옮겨가 있었다. 그는 달의 모양이 매일 밤 조금씩 차오르고 이지러지며 변화하고, 대략 서른 번 정도의 밤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부족의 여인들이 주기적으로 몸에서 피를 흘리는 신비로운 현상이, 저 하늘의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와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달은 단순한 밤의 등불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고 생명의 리듬과 공명하는 거대한 시계였다.
다른 별들보다 유난히 밝고 날카롭게, 마치 맹수의 눈처럼 반짝이던 하나의 점, 오늘날 우리가 금성(샛별 혹은 개밥바라기별)이라 부르는 그것은, 며칠 전만 해도 해 질 녘 서쪽 하늘에서 홀로 그 존재감을 뽐내더니, 오늘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새벽녘 동쪽 하늘에서 전혀 다른 모습, 다른 이름으로 나타날 터였다. 부족의 노인들은 저 별을 ‘먼저 온 자’ 또는 ‘나중에 오는 자’라고 부르며 경외감을 표했다. 다른 모든 별들이 마치 거대한 무리를 지어 밤새 함께 움직이는데, 왜 저 별과 몇몇 다른 특별한 별들은 마치 길 잃은 양처럼, 혹은 무리를 이탈한 외로운 늑대처럼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일까?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거대한 별들의 무리, 그가 마음속으로 ‘뿔 달린 거대한 순록’이라 이름 붙인 그 별자리(아마도 큰곰자리)는, 살을 에는 매서운 추위가 시작될 때와는 그 위치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한여름 밤에는 머리 꼭대기에서 빛나더니, 이제는 서쪽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대신 동쪽 하늘에서는 그가 ‘창을 든 용맹한 사냥꾼’이라 부르는 새로운 별자리(아마도 오리온자리)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의 별자리는 단순한 빛의 점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다가올 미래를 예고하는 거대한 달력이었다. 저 ‘창 든 사냥꾼’이 밤하늘 높이 떠오르면 곧 순록 떼가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할 것이고, 길고 굶주렸던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신호였다.
그의 뇌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생존 기계였다. 그의 감각은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스캔하며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저 붉은 열매는 아름답지만 독을 품고 있어 죽음을 부른다.’ ‘저 축축하고 부드러운 땅 위에 찍힌 발자국은 방금 지나간 신선한 고기, 즉 사냥감을 의미한다.’ ‘서쪽 지평선에서 낮게 깔리며 밀려오는 저 검은 구름은 곧 엄청난 폭우나 눈보라를 몰고 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살과 피가 되는, 생사를 가르는 즉각적인 지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 질문은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지도 않았고, 살을 에는 추위를 막아주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의 생존 확률을 단 1%도 높여주지 않는, 어쩌면 생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왜 저것들은 움직일까? 왜 달은 매일 밤 모양을 바꾸는 걸까? 왜 어떤 별들은 무리를 떠나 홀로 떠돌아다닐까? 왜 추워지면 나타나는 별 무리가 있고, 더워지면 사라지는 걸까? 이 밤하늘의 거대한 움직임과 지상의 계절 변화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걸까? 이 거대한 패턴은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저 반짝이는 무수한 가루들 너머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이것이 어쩌면 인류 최초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유(思惟)’였을지 모른다. 생존의 필요를 넘어선 순수한 궁금증. 그것은 인류가 감히 맛본 최초의 '지식의 열매(Fruit of Knowledge)'였다. 내 발밑의 땅, 내 손안의 돌멩이가 아닌,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저 멀고 높은 하늘을 향한 질문.
그의 동료들의 고른 숨소리만이 가득한 어둡고 조용한 동굴 안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와 자기 자신을 분리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저 무수한 점들과, 그것을 의식하며 바라보고 있는 ‘나’.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채우는 거대하고 고요하며,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물음표.
‘왜?’라는 질문은 그렇게, 가장 비현실적이고 가장 낭만적이며, 어쩌면 가장 비생산적인 풍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인류가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 너머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질서, 즉 ‘법칙(logos)’을 어렴풋이 상상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조용한 신호탄이었다. 이것이 바로 ‘설명(Explanation)’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갈망, 즉 ‘형성(Formation)’의 첫 씨앗이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세계가 ‘왜’ 그리고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이해하려는 대담하고 위험한 시도. 이 능력 덕분에 우리는 도구를 정교하게 만들고, 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여 사냥 경로를 계획하고 씨앗을 뿌릴 시기를 알게 되었으며, 마침내 수만 년 뒤에는 지구라는 행성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설명’ 능력의 탄생은 결코 대가 없는 선물이 아니었다. 그 열매는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치명적인 대가가 숨어 있었다. ‘나’와 ‘세계’를 분리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 순간, 인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 즉 ‘소외(alienation)’라는 상처를 얻었다. 이전까지, 수백만 년 동안 우리의 조상들은 세계의 일부였다. 그것은 고통이나 질문이 없는, 어쩌면 영원한 순수(Innocence)의 상태였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자신을 자연과 분리된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직 ‘나’라는 고독한 감옥이 탄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라고 묻는 순간, ‘나’는 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주체가 되고, 세계는 나의 탐구 대상인 객체가 된다.
우리는 그 질문과 함께 따뜻했던 합일의 낙원에서 영원히 추방당했다. 우리는 더 이상 세계 ‘안’에 온전히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마치 유리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듯, 세계 ‘밖’에서 세계를 관찰하는 고독한 관찰자가 되었다. 이 고독, 이 분리감이야말로 모든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낙원, 즉 세계와의 완전한 합일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그리워하며, 그 분리의 아득한 간극을 ‘의미’와 ‘설명’이라는 이야기, 즉 신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으로 메우려 한다. 그 모든 것은 이 최초의 분리에서 비롯된 근원적인 고독을 극복하려는 인류의 처절하고도 위대한 노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차갑고 명석(明晰)한 ‘설명’의 능력은 인류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패턴을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생존 경쟁에서 다른 어떤 종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했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읽어 계절의 변화를 예측한 이들은 언제 씨앗을 뿌리고 언제 사냥을 떠나야 할지 정확히 알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굶주림에 무력하게 허덕이지 않았다. 그들은 잉여 생산물을 창고에 축적했고, 그 잉여는 더 복잡한 사회 구조와 계급의 분화, 그리고 눈부신 기술의 발전을 낳았다.
하지만 이 차갑고 강력한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능력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들소를 효율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하면 홍수를 막을 튼튼한 둑을 쌓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줄 수 있었지만, “왜 우리는 이 고통스럽고 유한한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더 깊고 근원적인 질문에는 아무런 답도 줄 수 없었다. 이 ‘설명’의 세계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를 쥐여 줬지만, 그 지도를 들고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은 주지 못했다.
그 나침반은 차갑고 멀리 있는 밤하늘의 별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고통과 기쁨을 느끼며,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자신의 몸 안에, 바로 살갗 아래 숨 쉬고 있었다. ‘설명’의 능력이 우리를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으로 만들었다면, 우리를 그 생각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한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질문과 대답이었다. 그것은 머리가 아닌, 살갗으로 던지고 온몸으로 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이 차갑고 명석한 ‘설명’의 세계가 어떻게 뜨겁고 혼란스러우며 때로는 비합리적이기까지 한 ‘정당화’의 세계와 만나고 충돌하며, 마침내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 빚어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제 낭만적인 별밤의 동굴을 잠시 떠나, 모든 설명이 무력해지는 극한의 고통 속으로, 살을 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지옥 같은 설원으로 함께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