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질문, 하나의 역사

제1부: 두 개의 질문 - 생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by 한재영

제1장 하늘의 질문, 살갗의 대답


4절. 두 개의 질문, 하나의 역사


인류의 첫 사유가 차갑고 멀리 있는 하늘을 향한 형이상학적 질문, 즉 ‘설명(Explanation)’을 향한 순수한 지적 욕망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사유가 덧없이 스러지지 않게 우리를 이 땅 위에 단단히 붙들어 맨 힘은 바로 뜨겁고 가까운 살갗의 기억, 즉 자신의 고통스러운 존재를 ‘정당화(Justification)’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 두 개의 질문—“세계는 왜 이런 모습인가?” 와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은 마치 우리 뇌의 양쪽 반구처럼,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때로는 격렬하게 충돌하고 때로는 경이롭게 조화하며 인류 문명이라는 거대한 교향곡을 함께 연주해왔다. 인류의 지성사는 바로 이 두 세계 사이의 아슬아슬하고도 역동적인 줄타기, 그 길고 긴 여정의 기록이다.

‘설명’의 세계는 객관적이고, 차가우며, 나와 분리되어 관찰 가능한 영역이다. 그것은 흩어진 현상들 속에서 패턴을 찾고, 그 패턴의 원인을 분석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도구였다. 앞서 2절에서 동굴 속 원시인이 밤하늘의 별자리 움직임에서 계절의 변화라는 거대한 패턴을 처음으로 읽어냈을 때, 그는 ‘설명’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능력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힘을 안겨주었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게 된 후손들은 언제 강이 범람하고 언제 건기가 시작될지 예측하여 제때 씨앗을 뿌리고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었다. 그들은 더 이상 변덕스러운 자연 앞에서 속수무책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서도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아 미지의 대륙으로 용감하게 나아갔으며, 마침내 행성의 복잡한 궤도를 몇 개의 우아한 수학 공식으로 요약하여 달 표면에 자신들의 발자국을 새겨 넣었다. 설명의 힘은 우리를 자연에 순응하는 연약한 피조물에서,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예측하며 심지어 그것을 활용하여 세계를 바꾸는 강력한 지배자로 변모시켰다. 이 세계의 언어는 논리와 수학이며, 그 목표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단 하나의 진리를 찾는 것이다.

반면 ‘정당화’의 세계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뜨거우며, 결코 나의 살아있는 몸과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것은 차가운 설명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고, 관계 속에서 책임을 느끼며, 나의 유한하고 덧없는 삶에 왜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증명하는 행위이다.


3절에서 눈보라 속에서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일어선 저 사냥꾼의 처절한 ‘정당화’가 없었다면, 인류는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행동은 ‘설명’의 세계에서는 명백히 비합리적인 에너지 낭비였고, 어쩌면 생존 확률을 낮추거나 고통만을 더해주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당화’의 세계에서는 그것이야말로 그가 살아남아야 할, 그리고 살아남게 만든 가장 강력한 이유였다. 정당화의 힘은 우리를 단순히 영리한 생존 기계가 아닌, 의미를 추구하고, 사랑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때로는 비합리적인 용기를 내는 존재, 즉 ‘인간’으로 만들었다. 이 세계의 언어는 이야기, 예술, 신화, 그리고 종교이며, 그 목표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발견되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이다.


별을 보며 던졌던 순수하고 차가운 ‘왜?’와, 눈보라 속에서 온몸으로 답했던 처절하고 뜨거운 ‘왜?’. ‘설명’의 세계와 ‘정당화’의 세계. 이 두 개의 질문과 대답 사이의 길고 긴 여정, 그 둘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과 때로는 비극적인 충돌, 때로는 기적적인 조화. 그것이 바로 인류의 생각의 역사이며, 우리가 지금부터 탐험할 ‘감응의 연대기’다.


이 책은 바로 이 두 세계 사이의 아슬아슬하고도 창조적인 줄타기에 대한 이야기다. 인류는 때로는 두 세계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추며 위대한 문명을 꽃피웠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소티스(Sothis)'라 불렀던 시리우스 별이 태양과 함께 떠오르는 현상을 관측하여 나일강의 범람 주기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설명’했지만, 그 천문학적 지식은 동시에 죽음과 부활을 관장하는 풍요의 신 오시리스의 순환을 ‘정당화’하는 장엄한 신화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들의 달력은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과학적 도구였지만, 동시에 신들의 축제를 알리는 신성한 리듬이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간의 몸을 직접 해부하며 근육과 뼈의 구조를 누구보다 냉철하게 ‘설명’했지만, 그 해부학적 지식은 동시에 인간 육체가 가진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정신성을 ‘정당화’하는 불멸의 예술 작품, 모나리자의 미소나 최후의 만찬 속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을 창조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에게 과학과 예술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두 개의 눈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때로는 한쪽 세계로 치우쳐 스스로를 파괴적인 위험에 빠뜨렸다.


‘정당화’의 세계가 ‘설명’의 세계를 억압했을 때,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적 진실을 박해하고(갈릴레오의 재판처럼),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화형대에 세우는 광기의 암흑시대를 겪었다. 개인의 내밀한 감응과 신앙이 교회의 독단적인 해석이라는 획일적인 ‘정당화’ 아래 질식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의 과잉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것만이 진리’라며 눈앞의 명백한 사실(설명)마저 거부해버린 ‘맹목적인 독선(Dogma)’의 폭주였다. 현실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정당화는 구원이 아니라 폭력이 되었다.


반대로, ‘설명’의 세계가 ‘정당화’의 세계를 경멸하고 무시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더욱 끔찍한 비극을 맞이했다.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은 인간을 더 이상 고유한 감응과 존엄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를 위한 효율적인 ‘부품’이나 ‘자원’, 혹은 제거해야 할 ‘숫자’로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파괴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물론 나치에게도 그들만의 뒤틀린 ‘정당화(민족 우월주의)’는 있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가 그토록 끔찍했던 진짜 이유는, 그 학살이 뜨거운 증오가 아닌 ‘가장 효율적인 처리(설명)’의 방식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고유한 이름을 가진 존재(감응의 대상)가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통계적 수치’이자 처리해야 할 ‘물량’으로 전락했다. 가스실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버튼 하나로 살인을 ‘처리’할 수 있게 만든, 설명의 세계가 낳은 가장 차가운 발명품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은 ‘설명’의 논리가 ‘정당화’의 윤리를 완전히 집어삼켰을 때 나타나는 야만의 극치였다.


그리고 지금, 21세기. 모든 것을 데이터로 환원하고 알고리즘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인공지능의 시대 앞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정당화’의 세계, 즉 감응의 가치를 잃어버릴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인공지능은 ‘설명’의 세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자식이자 가장 완벽한 화신이다.


물론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학습된 데이터를 통해 인간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때로는 인간보다 더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은 수억 개의 데이터를 조합한 정교한 ‘확률적 흉내(Simulation)’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AI는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말 때문에 심장이 터질 듯 뛰거나 밤잠을 설치지는 않는다. 기계에게 감정은 처리하고 출력해야 할 텍스트 데이터일 뿐이지만, 인간에게 감정은 온몸으로 겪어내야 할 생생한 ‘정당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강력하고 효율적인 도구에 매료되어, 점차 우리 자신의 ‘정당화’ 능력—서로가 상처받는 육신이기에 겪어야 하는 치열한 고민과 공감, 오직 유일하며 죽음이 예정된 존재만이 짊어질 수 있는 무거운 사랑과 책임의 능력—을 낡고, 느리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효율성에 매몰되어 자칫 방향을 잃는다면, 우리는 AI 조종사가 망설임 없이 폭격을 감행하고 그 참혹한 책임은 알고리즘의 안개 속으로 흔적 없이 증발해버리는, 파괴적인 결과는 있되 그 무게를 짊어질 주체는 어디에도 없는 섬뜩한 무책임의 세계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질문해야 한다.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혹은 살갗 아래서 고독하게 일어났던 이 두 개의 질문은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는가? 개인의 내밀한 ‘감응’은 어떻게 공동체의 ‘신화’가 되고, 최초의 ‘사회’를 탄생시키는 거대한 약속으로 발전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제 다시 한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었던 그곳, 동굴 속 타오르는 모닥불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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