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요즘처럼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조차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라는 질문이 이전보다 훨씬 자주 떠오른다.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판단의 기준은 흐려지며,
어제의 정답이 내일의 오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마치 갈릴레이가 천동설의 모순을 밝혀냈던 것처럼 말이다.
시대가 빠르게 변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우리는 때론 그 답을 부모에게 묻거나,
혹은 선생님이나 친구로부터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인공지능(AI)에게까지 질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의견을 듣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오랜 시간 고민한다 하더라도
그만큼 현명한 판단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내 취미인 바둑에도 이와 비슷한 격언이 있다. '장고 끝에 악수둔다.')
오랜 시간 고민한, 좋은 취지의 행동조차도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결과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서로의 이해관계 또한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애시당초에 삶의 매 순간 옳은 선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이를 잘 보여주는 두 사례가 있다.
적들에게까지 군자의 도리를 베풀었던 송나라의 '양공’,
그리고 고려의 백성들을 위해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옳다고 믿는 선택’을 따랐지만,
결과는 극명하게 갈렸다.
상황만 놓고 본다면
적에게까지 관용을 베푼 양공의 선택은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인도적이고 도덕적인 결정처럼 보인다.
반면, 추위에 떠는 백성들을 위해
타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행동은
규범을 어긴 ‘밀수입’이라는 비윤리적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훔치는 행위에 대한 경멸’이라는 가치조차
상황과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판단으로 이어진다.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
내 얕은 견해로는,
모두에게 옳은 선택이란 ‘정답’이 아니라,
모두의 이해득실을 완벽히 충족시키는
신기루 같은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
자신의 이해득실을 기준으로
타인의 선택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목이 쉬도록 외치는 ‘옳은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옳고 그름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그 기준이 있는것인가, 만약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기준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질문에 완벽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아니, 애초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조건 안에서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면 될 뿐이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도, 원망도
이미 흘러간 시간을,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수많은 인생 중 한 장면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정작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현재를 돌아보지 못한다.
그러한 후회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도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자신의 결정이 불러온 결과를
그 누구의 탓으로도 돌리지 않고
스스로 온전히 책임지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전부라 믿는다.
다만 ‘책임진다’는 말을
모든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당신이 못나서, 운이 없어서,
벌받을 만한 사람이어서 그런 시련을 겪은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본래 좋고 나쁨이 없다.
단지 우리의 상황과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러니 더는 지나간 과거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괴로워하지 말자.
최대한 다양한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되
마지막은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라.
비록 나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삶에 관한 일이라면 더더욱
결정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면
당장의 부담은 덜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결국
온전히 나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옳은 선택이란
모두에게 인정받는 결정이 아니라,
선택 이후의 삶까지 책임질 수 있는
‘신념의 문제’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살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