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평보다 작은 공간.. 숲속 도서관 카페 창가, 바 테이블 자리.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마음속에 어떤 장소를 품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설레고, 가기만 하면 마음이 충만해지는 그런 장소를. 나에게는 그런 곳이 있다. 참 다행이게도, 여행을 떠나야만 갈 수 있는 거창한 장소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너무 멀거나 가기 힘들어서 자주 가지 못한다면 박탈감만 커질 것 같은데 나의 이 장소는 한 시간정도만 여유가 생겨도 훌쩍 다녀올 수 있다. 작은 소음이나 소통에도 쉽게 지치는 나같은 사람이, 직장에서는 학생들과 교직원들과 학부모들과 끊임없이 소통을 하고, 퇴근해서는 딸아이랑 지지고 볶는데도 큰 무리 없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아마 접근성이 좋은 탓에 자주 이 장소에서 재충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곳은 바로.. 집 근처 공원 안에 있는 숲 속 도서관 카페이다. 그 카페에서도 숲과 나무가 바로 보이는 창가 바 테이블 자리. 여기에 앉기만 해도 일단 내 몸이라는 스마트폰에 c타입 충전케이블을 꽂은 느낌이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 카페에서 주문한 치즈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이면 그냥 일반 충전기가 초고속 충전기로 업그레이드 된 기분이다.
시간대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 사이가 좋다. 주말에 주로 가지만 어쩌다 방학이나 휴무일인 평일에 가면 더더욱 좋다. 3시가 넘어가면 카페인의 위력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밤에 잠들기 어렵다. 그리고 미세하게 웅성웅성하던 카페의 자연 소음은 이 시간 이후 와글와글 커지기 때문에.. 3시가 되기 전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후다닥 나오는 편이다.
이 카페가 있는 도서관에서 여러 종류의 책을 빌린다. 철학서, 인문학서, 육아서와 소설책 등... 소설책은 꼭 한 권 이상 포함해서 빌리는데 이 장소에서는 그것들 중 소설책만 읽는다. 다른 종류의 책들은 나의 인지구조에 미세한 균열과 변화를 일으키며 그것마저도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소설만큼은.. 그냥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소설이라는 문학을 연구하고 제대로 읽는 사람들은 내가 소설을 잘못 알고있어서 그렇게 생각 없이 읽는 거라고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폄하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냥 내가 문학적 소양이 크게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만화책 읽듯이 그냥 재미있게만 읽는데.. 나는 문학적 소양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냥 쉬려고 읽으니까.)
하염없이 읽던 소설책에서 근사한 문장이라도 발견하면 마치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예쁜 조개껍데기를 발견한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다이어리에 깨알같이 적는다. 악필인 탓에 초등학생이 수업 중 낙서하듯 적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하다.
아니, 너 그 좋은 직장을 다니는 애가 왜! 방학에 길게 여행을 안 가니
집에만 있다가 기껏해야 도서관이나 카페나 가고 너는 왜 그 소중한 여가시간을 지루하게 채우니
세상이 얼마나 넓고 새로운 곳이 많은데, 여행을 다녀야지 여행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소에 가서 사진도 찍고, 맛집에 가서 먹으면서 인증샷도 찍고! 그렇게 살아야지 진짜 노잼이구나 너.
친구들의, 가족들의 질책(?)에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나는 여행을 준비하고 떠나고 거기 도착해서까지 아마 에너지를 다 써버릴거야. 짐을 챙기고 교통편과 숙소를 알아보면서 각종 변수들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해 놓고, 무엇을 낯선 장소에서 시차에 적응하며 억지로 잠이 들면 제대로 그 에너지를 충전하지 못하겠지? 제대로 에너지를 충전하지 못 한 장소에서 사람이 많을 것이 뻔한 여행 명소에 가겠지. 그곳에서 와글와글 떠느는 사람들에게 치이며 급속도로 에너지가 바닥나겠지. 근데 나처럼 성실한 사람이..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계획했던 장소에 다 가야 하잖아. 억지로 억지로 사학과 대학생들이 유적 탐방 과제하듯이 그 모든 곳을 다 돌고 나면 또 낯선 곳에서 잠이 들고 또.... 게다가 그게 나 혼자 떠난 여행이 아닐테고 가족이든 친구든 함께 한다면 함께하는 사람들의 컨디션과 마음도 신경을 써야 하겠지. 나 혼자가 아니니까 아무거나 먹기도 아무데나 들어갈 수도 없고. 물론 사진들은 건지겠지. 근데 나는 여행 다녀온 사진을 다시 볼 때마다, 아 여기 진짜 좋았지라는 생각보다는 '아..이때 다니느라고 진짜 죽는 줄 알았어'라는 생각이 들곤 해. 사실 그 사진들 잘 보지도 않아. SNS에 여행사진 올리고 좋아요 받으면 뭐 하니. 언젠가부터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SNS도 안 하는데.. 그 여행사진은 내 SNS가 아니고 다른 사람 SNS에서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장소이고 음식이고 경험인걸.
지금처럼 방학이면, 모두가 분주한 평일 낮에, 딸아이가 태권도학원과 피아노학원을 간 사이
슬며시 나의 최애 장소에 아무도 모르게 머물다 오고 싶다. 그게 나에게는 유럽의 어느 명소보다, 미국의 어느 맛집보다, 동남아의 어느 바닷가보다 더 설레고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