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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Aug 12. 2021

성냥불 켜는 소녀와 할머니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

 난방을 하지 않은 방안은 냉골이었다. 깨진 유리창문으로 칼바람이 들어온다. 코끝이 시리다. 갑자기 빗줄기가 내린다. 화분 위에, 시멘트 바닥 위에, 바케스 위에, 수돗가에 내린다. 후드드득.... 방 한쪽 귀퉁이에서 담요와 솜이불을 겹겹이 덮은 여든의 할머니는 연신 콜콜 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눈을 비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할머니, 비 소리야. 겨울비가 갑자기 오네."

"그런데, 네가 밖에다 죄다 양철을 깔아놓았니? 시끄러워서 못 자겠다."

"할머니, 갑자기 내려서 그래. 난 기운 없어서 그렇게 못해."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온다는 아빠는 보름 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빠는 성냥 공장을 운영했고, 성냥 수요가 줄다 보니 빚만 진 채 문을 닫았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성냥 집 딸', '성냥 집 소녀'이라고 불렀다. 방구석에 재고로 남은 성냥갑이 쌓여있었다.

아빠는 공장 폐업 후에, 트럭에 생선들을 싣고 다니며 팔았다. 강원도 깊숙한 산골을 다니고, 경북의 시골 마을, 충정도의 골짜기까지, 전국 안 다니는 곳이 없었다. 트럭 조수석에 앉아 아빠를 따라나선 적이 있다.  손에 뽑을 정도였으나 신나는 경험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는 소녀는 아빠를 따라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아픈 할머니를 혼자 집을 둘 수는 없었다. 어떨 땐 할머니가 없었으면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내 도리질을 했다. 할머니는 소녀에게 엄마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조수석은 높고 불편했으나 트럭에서 풍기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좋았다. 아빠 냄새와 닮아 있었다.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시골 마을의 정취도 더없이 좋았다. 울퉁불퉁한 돌담길이며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굴뚝, 아이들이 질색하는 소똥 냄새도 정겨웠다.  경북의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 아빠가 쭈욱 늘어지는 녹음된 테이프를 틀었다.

"싱--싱한 고등어, 갈--치가 왔어요."

털목도리를 두른 중년의 여자가 트럭 앞으로 다가왔다.

"한 달 만에 왔네요. 맨날 풀떼기만 먹다 생선이 먹고 잡았는데. 딸인갑네요. 이쁘장하게 생겼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싫지 않았고, 아빠와 중년 여자의 흥정도 재미있었다.

"요거, 작은놈 한 마리 끼어줘요."

"좋다! 인심이다."

중년의 여자는 흡족한 얼굴이다. 기다려 보라며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나에게 다시 와선 홍시 한 개를 내민다. 아빠를 따라다니면 무엇보다 군것질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찐 옥수수, 김이 나는 굵은 감자, 참외, 한과 등등. 뿐만 아니라 새총, 인형 등의 장난감도 있었다. 시골 인심은 넉넉했다. 말랑말랑한 홍시를 받아 쥐고 휴지에 고이 쌓다. 할머니는 홍시를 좋아한다. 숟가락으로 한 입 퍼 들이면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다. 홍시를 손에 꼭 쥐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홍시가 으깨진 상태였다. 소녀는 울상이 됐다.

"그건, 너 먹어라. 마트에 들러 홍시 사면 된다."

아빠가 덤덤하게 말했으나 소녀는 기분이 풀지지 않았다. 그 아줌마가 준 홍시는 씨도 없고 달달하니 맛있었다. 마트와는 비교도 안 됐다.


"추워, 추워."

누워있던 할머니는 몸을 일으킨다. 머리카락이 엉클어지고 눈도 휑하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기름보일러는 어젯밤부터 돌아가지 않는다. 아빠는 강원도 산골에서 폭설로 발이 묶였다며 며칠 전에 연락이 왔었다. 그리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빠는 할머니를 잘 모시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담요 자락을 끌어당겨 할머니의 목덜미를 감싼다. 깡마른 할머니의 손이 차다.

소녀의 눈에 다방 글씨가 큼직하게 박힌 성냥갑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녀는 성냥을 켜려고 했으나 오래 두어 눅눅해져서인지 좀처럼 켜지지 않는다. 성냥개비 서너 개를 쥐고 다시 켠다. 불꽃이 인다. 매캐한 냄새가 좋다. 할머니의 얼굴도 희미하게 밝아진다.

"따뜻하다. 아이 좋아라. 그런데 배가 고파. 밥 줘."

할머니는 엊저녁에 물에 만 밥을 반 그릇을 먹고 여태까지 먹지 못하고 있다. 소녀도 마찬가지다. 아빠가 떠나기 전에 근처 슈퍼에 가서 외상으로 갖다 먹으라고 했으나 슈퍼 주인은 완고했다. 외상값을 갚기 전에는 더 이상 외상을 줄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가 마른기침을 쉴 새 없이 뱉어낸다. 소녀는 물 한 모금을 할머니에게 건넨다. 할머니는 허겁지겁 물을 들이켠다. 할머니의 얼굴이 창백하다.

"어여 달리니깐. 너만 먹지 말고."

"할머니, 나도 못 먹었어. 잠시만 기다려 봐."

소녀는 두 번째로 성냥갑을 집어 든다. 처음보다 더 많은 성냥개비들이다. 이번엔 한 번만에 불꽃이 화르륵 인다.

"할머니, 우리 먹고 싶은 거 이야기해 볼까? 아빠 오면 맛있는 거 사 올 거야. 그때까지만."

"너만 처먹지 말고 달라니깐."

소녀는 입을 크게 벌린다. 입김이 올라온다. 할머니 침침한 눈으로 소녀의 입속을 살핀다.

"봐. 아무것도 없지. 할머니, 나도 배 고파... 먹고 싶은 게 뭐예요?"

"응, 난 그 뭐냐? 율--무."

할머니는 모든 음료가 율무로 통했다. 두유를 줘도 율무라고 했고, 바나나 우유를, 미숫가루를 타 줘도 율무라고 했다. 할머니가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단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난, 뽀로로. 할머니, 또 먹고 싶은 건 없어?"

 "음, 그게 뭐더라. 뻘건 것 있잖아?"

"뻘 건 것 뭐. 비빔밥?"

"아니, 뻘겋게 무친 거. 바다에서 나는 거."

"응, 오징어 볶음."

"그래, 그거 같아."

할머니는 해산물을 좋아했다. 오징어, 새우, 굴, 조개 등등.

"자꾸 잠이 와. 엄마 곁으로 가고 싶어"

소녀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할머니 입에서 '엄마'란 단어는 처음 나왔다. 소녀도 처음이다. 태어나서 엄마라고 불러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엄마 대신에 늘 할머니였다. 엄마라는 단어는 낯설다. 아니 불안하다. 할머니는 다시 자리에 눕는다.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입술이 새파랗다. 할머니는 얕은 신음소리를 낸다.

"할머니, 자면  안 돼. 아빠가 곧 올 거야."

할머니의 신음소리도 잠잠해지고 소녀도 하품이 난다. 할머니 곁에 눕는다. 소녀의 몸에 닿는 할머니 살결이 차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탓이리다.

아침 햇살이 유리 창문 틈으로 들어온다. 소녀는 눈을 뜨고 이불을 걷어 할머니의 인기척을 살핀다. 할머니의 낯빛이 거무스름하다. 온몸이 경직돼 있다. 소녀는 할머니는 몸을 흔든다.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는다.

"할머니, 눈을 뜨야지. 떠난 말이야. 율무도 먹고, 오징어 볶음도 먹어야지"

소녀의 눈가에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두렵고 무섭다. 할머니 곁에 혼자만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어젯밤에 남겨둔 성냥갑으로 손이 간다. 세 번째로 성냥을 켠다.

"할머니, 우리 불쌍한 할머니가 눈을 뜨게 해 주세요."

소녀가 소원을 빌었다.

성냥 불빛 사이로 할머니의 환한 얼굴이 보인다. 소녀가 미쳐 주지 못한 홍시를 핥아먹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소녀야, 난 이제 엄마 곁으로 갈란다. 너도 나 걱정하지 말고 아빠하고 신난 트럭여행 계속하렴. 너를 만나서 행복했단다."

"할머니, 할머니.."

소녀는 할머니를 안타깝게 불러보지만 성냥 불꽃이 꺼지면서 할머니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누워있는 할머니의 표정은 평온하다. 소녀는 울음을 토해낸다. 흑흑흑.. 힘이 없어 더 이상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방문이 열린다. 햇살 한 줌에 소녀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검은 형체의 사나이가 서있다. 아빠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못 알아볼 뻔했다. 아빠는 팔다 남은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서있다.

소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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