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질환에 대한 낙인 (stigma)
'정상'이라는 단어는, 묘한 안도감을 준다.
내가 '정상'이라는 것은 곧, 특별하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들과 동떨어진,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반대로, '나는 비정상이다'라는 생각은
자존감과 자의식에 깊은 균열을 일으킨다.
- 정신 질환을 진단받은 날이, 내겐 그런 순간이었다.
우울증.
ADHD.
식이장애.
이 세 가지 진단을 받은 내게
의사 선생님은 '많이 힘드셨겠어요'라며 위로를 건넸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어려움이
내가 게으르거나 나약해서가 아니라
'병' 때문이었다니."
진단을 받으면 홀가분할 거라 예상했건만,
정작 '환자'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니 감정이 복잡 미묘해졌다;
더 이상 정상인의 반열에 낄 수 없을 거라는,
어쩌면 평생 '환자'라는 타이틀을 안고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울증 환자입니다.'
우울, 불안 등 힘든 증상을 경험하는 이들에겐,
본인이 '환자'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삶 곳곳에 산재해 있던 증상들이 하나의 진단명으로 묶이는 순간
그 증상들은 하나의 '실체'를 갖추게 되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도 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진단명이 때로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우울증'이라는 병이 내 일부가 되어
나의 아이덴티티 (identity)를 규정짓는 순간
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가까운 몇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러자 (자격지심 때문일까) 이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작은 실수에도
'우울해서 그런 거니?' 혹은 'ADHD 때문이니?'라는 농담이 들려왔고,
기분이 가라앉아 있거나 짜증을 내면
'혹시 약 먹는 거 깜빡했니?'라는 말이 따라왔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일 수도 있다, 내가 과민한 걸 수도 있다 - 라 아무리 되뇌어 봐도,
여전히 그 말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현실과
나 자신도 정신질환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음이
더욱 선명하게 와닿았으니 말이다.
감기, 독감, 암 등... 다른 병을 앓았어도, 같은 반응일까?
왜 정신 질환은 다른 병과 유독 다르게 느껴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신 질환'이라는 개념의 의의
사전을 찾아보면, '질병'은 생물의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비정상적'인 상태를 뜻한다
이 연장선 상에서, '정신질환'은 곧 정신이 곧 '비정상'이라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지금 '환자'라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비정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평생 건강(=정상) 과 병듦(=비정상) 사이를 오가며,
살면서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 마음 역시 수시로 상처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렇기에, 몸과는 다르게 마음만은 평생 '정상'이어야만 한다는 게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여기서, 감기나 독감, 암 등의 질병을 '병'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던 과거에는, 감기가 저주로 여겨지거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했음을 생각해보라.
물론 가만히 두면 낫는 잔병치레도 있으나,
대부분의 병은 홀로 극복하기 어려우며, 외부의 개입(치료)을 요한다.
마찬가지로, 정신 질환도 외부의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의 '병'으로 정의된다.
즉, 정신 질환은 당사자를 낙인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다.
We are all wired for addiction
(우리는 모두 '중독'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베스트셀러 '도파민 네이션(Dopamine Nation)'의 저자, 안나 렘케 교수(Anna Lembke)의 말이다.
인간의 뇌는 외부 세상과 관계를 맺도록 설계된 만큼, 누구나 특정 대상에 '묶일' 수 있다;
그 대상은 가족 또는 애인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게임이나 쇼핑 등의 행위가 될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알코올, 담배, 마약 같은 물질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한 가지 대상에 매몰되는 상태를 우리는 '중독 (addiction)'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정신 질환이 생길 소지를 가지고 있다;
극심한 시련을 겪으면 깊은 우울에 빠질 수 있고,
탈출구 없는 문제 앞에 서면
느닷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정신 질환은 고통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 (Mental illness is a normal response to suffering)'이라는
정신과 의사 가보르 마테 (Gabor Mate)의 말처럼,
정신 질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감정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때문에 도움을 받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 오히려 스스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끼며,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려는
의지가 담긴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신 질환'에 대한 낙인 (stigma)
'우리는 모두 환자이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인상 깊었던 대사이다;
- 정신 질환의 유무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 각자의 고충을 지니고 있으며,
누구든 예기치 못한 순간 '환자'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비정상이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온전히 수용하기 위해,
그리고 내 주변 사람에게도 낙인을 찍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되뇌어 본다;
내게 병이 있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비정상인 것은 아니다.
'우울증, ADHD, 식이장애'는
그저 지금의 내게 주어진 과제일 뿐이다.
정신과에 다녀온 것은,
나 자신이 '환자'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정확히 알아나가기 위한 첫 단계였다.
한 걸음을 힘겹게 뗀 자신에게 다음 질문들을 던져 보았다;
"내 성향의 어떤 부분들이,
내 삶의 어떤 요소들이, 현재의 진단으로 이어졌을까?"
'앞으로 이를 바꿔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비정상이야'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니,
비로소 나 자신을 마주 볼 힘과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 글의 주제>
정신 질환을 치유하기 위해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나의 '과거'와 화해하는 과정이다.
나를 옭아매던 상처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치유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