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이 가지는 힘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랑 (Unconditional love)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경험이 있는가?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더라도
조건 없이 나를 품어주던 존재가 있었는가?
부모님을 비롯한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각박한 삶 속에서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무조건적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내면을 지니게 된다.
반대로, 자신이 잘나갈 때나 성과를 낼 때에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경험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조건부 사랑(Conditional love)일 것이다.
이런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기 비난의 굴레에 빠지기 쉬워진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EEAAO))'를 통해,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이 왜 중요한지 살펴보려 한다.
살다 보면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까지 해온 선택들이 후회스럽기만 하고,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둠에 갇힌 기분이 들 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EEAAO)' 는,
이런 삶의 위기 속에 놓인 '에블린(Evelyn)'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에블린은 중국 출신 이민자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과 미국에서 새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그녀가 맞이한 현실은 꿈과는 너무도 멀었다 -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시작한 빨래방 사업은
끝없는 노동과 여유 없는 삶을 가져다 주었고,
그 결과 남편과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져만 갔다;
(심지어 남편은 그녀 몰래 이혼을 고민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렸을 땐 귀엽기만 했던 딸 조이마저
어른이 되어 동성애자이자 타투를 즐기는 '반항아'로 성장해 있었다;
모든 것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
희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갇힌 에블린에게,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다른 멀티버스(평행 우주)에서 온 딸 조이(Joy)가 우주 최강의 빌런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조이가 악당이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다른 멀티버스에서 에블린은 저명한 물리학자였고,
'버스 점핑(Verse Jumping)'이라는
평행 우주 간을 넘나들 수 있는 기술을 발견한다.
딸 조이는 유독 이 기술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고,
에블린은 딸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려는 욕심에
조이를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과부하가 걸린 조이의 정신은 모든 우주 안에서 분열되었고,
그녀는 모든 평행 우주를 동시에 경험하며 왜곡시킬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얻게 된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가 된 조이는
온 우주를 활보하며 지식과 경험을 쌓지만,
오히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허무주의에 빠진다.
그리고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에 잠식당한 그녀는
우주 곳곳을 파괴하며,
모든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찾아 없애기 시작한다.
조이를 빌런으로 만든 것은,
결국 에블린의 어긋난 모성애와 조건부 사랑이었던 것 아닐까.
에블린은 자신만이 딸의 악행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절망과 후회에 갇혀 있던 그녀는
다른 우주에서 온 딸과 대적하며
자신의 삶, 그리고 딸의 마음을 돌아보게된다.
- 이런 기상천외한 스토리를 통해, 이 영화는 삶 속에서 길을 잃은 한 여자가
무수한 선택지와 가능성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세대 트라우마 (Generational trauma) 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 세대의 상처와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에도 대물림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EEAAO에서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세대 트라우마'에 의해 빚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속 에블린은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인물이다;
그녀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집안에서 자라며 핍박을 받고,
가족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
타지에서의 결혼 생활 속에서도 그녀의 상처는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가족 사업에 매달리느라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었던 에블린은
남편과의 관계에도 소원해지고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기만 하는 딸에 대해 실망감만 느끼게 된다.
- 그리고 에블린은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자각하지 못한 재,
딸에게도 그 상처를 대물림하게 된다.
조이에게 어머니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녀는 에블린의 사랑을 갈구하며,
어머니가 성소수자이며 자유로운 본성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린다;
이렇게 내면의 갈등과 고뇌로 가득찬 조이는
영화 내내 어둡고 불안한 표정으로 비춰진다;
애석하게도, 딸의 속내를 들여다 볼 세심함과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넬 마음의 여유를 갖추지 못한 에블린은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딸에게 '잔소리'와 '훈육'만을 퍼붓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에게서 조건부 사랑만을 받아온 조이는,
스스로도 자신을 사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 아버지에게 거절당했던 에블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조이를 절망에 빠지게 한 장본인도 에블린이었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그녀를 구원한 것도 에블린이었다.
영화가 진행되며 에블린은 수많은 멀티버스를 넘나들고
자신의 선택과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깨닫는다 -
바로 '자신의 모습과,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에블린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딸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조이를 더 이상 고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고,
딸의 상처, 아픔과 부족함마저도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조이도 자신을 받아들이고,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힘을 얻게 된다.
불완전하며 허점 투성이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 에블린의 의지로 인해,
그녀 자신,
그리고 딸도 치유받는다.
'조이'를 온전히 수용한다는 표현을 영어로 바꿔보면 'Embracing Joy' 가 된다-
조이(Joy) 는 '기쁨'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즉, 에블린은 조이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기쁨 (Joy)'을 끌어안는 법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에블린의 딸 이름을 '기쁨 (joy)'이라 지은 것도, 그런 이중적인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을지 추측해 본다)
영화, '버킷 리스트 (Bucket List (2007))' 에서 모건 프리먼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남긴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죽음을 맞이하면 두 개의 질문을 받는다고 믿었지;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가 정해지는 거야.
첫 번째 질문은
'그대는 삶에서 기쁨(Joy)을 찾았는가?'
두 번째 질문은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기쁨(Joy)을 준 적이 있는가?'
무조건적인 사랑,
즉 자기 자신,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조건없이 바라보고 수용하는 것이야 말로
삶의 '기쁨(joy)'을 지켜내는 근간이 된다.
EEAAO 는 에블린과 조이의 애증의 관계를 통해
다음의 메시지를 설득력있게 전달한다;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사랑받으며
삶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만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의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 같은 사람,
기댈 곳이 없어 막막한 사람.
- 힘든 상황을 헤쳐나가고 있는 모두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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