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용량이 거의 다 찼다는 알람이 떴다. 가장 많은 용량을 차지하는 건 영상 파일이었다. 페스티벌과 공연을 다니기 시작하며 영상을 찍는 일이 많아졌다. 평소엔 잘 보지도 않던 동영상 파일을 하나씩 열어보며 추억에 잠겼다. 처음엔 웃음 지었지만, 갈수록 마음이 답답해졌다.
사회성이 부족한 나는 대학에 가고, 군대에 입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아니 그전에도 있긴 했나.
과거에 두고 온 사과와 분노와 서운함이 가끔 떠오른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헤어져야 할 때를 자연스럽게 알던데, 떠날 때를 어떻게 알고 꼭 필요한 말을 하고 떠나가던데. 현실에서 이별은 왜 이리 갑작스러운 걸까? 때론 이별다운 이별도 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한다.
"나도 슬퍼."
"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를 못해서."
"늘 했잖아."
"근데, 마지막에 제대로 못 했어. 마지막인 줄 몰랐거든."
"할머니도 모르셨을 거야."
영화 <쁘띠마망>은 작별 인사를 하며 시작한다.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긴 복도를 따라 방마다 들어가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노인들은 당황해하며 인사를 받아준다. 외할머니에게 제대로 하지 못한 작별인사를 나누는 듯이.
8살 소녀 넬리는 예고 없는 이별을 겪었다.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넬리 가족은 외할머니댁으로 간다. 이별의 잔열에 힘들어하던 엄마는 넬리와 아빠만 뒤로한 채 먼저 집으로 돌아간다. 엄마가 떠난 시골집, 혼자 숲으로 놀러 간 넬리는 놀라운 일을 겪는다.
내가 처음으로 겪은 죽음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선생님의 호출로 갑작스럽게 교무실로 불려 갔다. 아마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침에 엄마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실지도 몰라.' 미리 귀띔해줬기 때문이 아니다. 어른들의 대화에서 짙은 안개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안개는 너무 짙어서 안개라고 부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안개라기보다는 땅에 내려앉은 먹구름 같았다.
12살의 나에게는 외할머니의 죽음이라기보다, 엄마의 엄마의 죽음이었다. 이제 외할머니를 다신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어렴풋이 알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슬퍼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항상 밝던 엄마의 눈물과 슬픔이 슬펐다. 어른의 눈물은 아이의 눈물보다 무거웠다.
넬리는 숲속에서 또래 아이를 만난다. 엄마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던 여자아이. 넬리와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아이. 외할머니집이랑 똑같이 생긴 집에서 사는 그 아이. '마리옹'. 그 아이에게서 엄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곳에는 외할머니가 살아 있었다. 마치 넬리에게 작별 인사를 할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듯이.
넬리는 이별이 다시 찾아올 걸 알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넬리는 마리옹과 보드게임을 하고, 역할극을 하고, 크레이프를 만들어 먹고, 나무 오두막을 짓는다. 이제 넬리는 알고 있다. 모든 순간이 이별이라는 걸. 다음번은 없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 이 순간을 보내줘야 한다는 것을.
내게도 넬리와 같은 두번째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는 잘 이별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알고 있다. 첫 번째 이별 이후, 모든 시간이 두 번째 기회라는 걸.
집앞 작은 텃밭에서 일하시던 외할머니, 일하시다가도 반갑게 반겨주시던 외할머니, 꺼실한 손에서 촉촉한 흙냄음이 나던 외할머니, 가을이면 메주를 쑤시던 외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