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보고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와 되돌아보면 긴 우울의 터널을 지나고 있던 중이었던 것 같다. 매일 밤 스스로 살을 도려내던 밤, 내가 나를 괴롭히는지 조차 모르고, 잘못한 일이 없어도 자신을 자책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살과 함께 기억의 조각도 떨어져 나가 내가 계속 작아졌다. 방의 구석에서 계속 작아지는 나만 남았다.
아무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찾아온다. 그 긴 터널을 지나고 나면 세상을 예전과 똑같이 볼 수 없다. 강렬한 빛은 쐬고 나면 눈에 얼룩이 남듯이, 터널의 잔여물은 눈 위에 부유하다가 일시에 찾아온다. 이유 없는 호의를 믿을 수 없게 되고, 찾아온 행운을 의심하게 된다. 행복을 만끽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 저주를 지혜로 착각하기도 한다. <에브리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주인공 에블린도 마찬가지다. 남편 레이먼드와 아메리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한 그녀는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성소수자인 딸은 사춘기인지 자꾸만 엇나가고, 이제 노쇠한 아빠는 간호가 필요하다. 게다가 깐깐한 세무 조사까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데,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는 건 나뿐이다. 번듯하게 성공해서 나를 못마땅해하던 아빠에게 보란 듯이 단란한 가정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왜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
에블린을 가장 답답하게 만드는 건 레이먼드다.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며 꼬실 땐 언제고, 이젠 남의 편만 든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안 보이나? 왜 항상 낙천적이지? 허허실실 웃는 남편을 보면 짜증이 치민다. 우리 가정을 지키려면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잡고 있어야해. 정리한 영수증 무더기를 챙겨 국세청으로 간다.
미국 생활의 운명이 달린 중요한 순간, 준비한 자료의 공백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국세청 직원 앞에선 에블린.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그때, 시야가 흔들리고 다른 세상이 겹쳐 보인다. 눈앞이 갈라져 보이고, 이 세상의 소리와 다른 세상의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갑작스럽게 무수한 멀티버스와 마주친 에블린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조우하게 된 에블린의 운명은 세상을 구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든 멀티버스를 경험하고 허무에 빠진 이 세상의 악당 '조부 투파키'에 맞설 유일한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에블린이 멀티버스를 겪으며 더 많은 세상을 보면 볼 수록 조부 투파키에게 동화되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의미 마저 남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에블린은 허무에 빠지게 된다.
사업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딸을 바르게 키기 위한 노력도, 가정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모두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에블린의 몸도 감정도 점점 끝없이 추락하는 돌덩이처럼 잠수한다.
바닥에 한없이 가까워져가는 그때,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약하디 약한 목소리. 어두컴컴한 깊은 심해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추락이 멈추었다. 빛이 있을 리 없는 곳에서 작은 불빛이 보였다. 작지만 따뜻한 빛이 느껴졌다. 마냥 순진해 보이기만 했던 사람, 약해 보이기만 했던 사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 무능력한 나의 남편 레이먼드. 그는 순진한 것도 멍청한 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무의미함 앞에서 다정함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그는 모든 허무 앞에서도 친절함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