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게도 매년 문화체험비가 지원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덕분에 매년 올해는 무엇을 배워볼까 즐거운 고민을 한다. 즐거운 고민이라고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준을 세워본다. 첫해에는 평소에 해보고 싶었지만 배우지 못했던 독립 출판 수업을 들었다.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해봤으니 이번에는 평생 안 해볼 것 같은 일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평생 안 해볼 것 같은 일을 나열해봤다. 크게 1. 복싱, 2. 주짓수, 3. 연극 연기, 4. 보컬 등등…. 나열해 보니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격하게 움직이는 격투 운동과 남들 앞에 나서는 어떤 활동들. 내향적 관종인 나는 그중 남들 앞에 나서서 하는 일을 선택했다. 1월 회사 앞에 있는 보컬 학원에 등록했다.
락 밴드 경연이 한창인 공연장, 눈두덩이를 시커멓게 칠하고 레진 자켓을 풀어 헤쳐 입은 거친 락커들이 즐비해 있다. TPO에 맞지 않게 나타난 무해한 존재. 이제 겨우 10살이나 되었을까? 명문사립학교 교복을 야무지게 커스텀해 입은 아이들. 한참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이 아이들은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나타난 아델리 펭귄 무리처럼 쌩뚱 맞다.
삼류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듀이 핀(잭 블랙)은 자신이 만든 밴드에서도 쫓겨난 것도 모자라 얹혀살고 있는 친구 집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절묘한 타이밍에 친구에게 찾아온 채용 전화를 듀이가 받는다. 듀이는 친구의 이름을 사칭하고 명문사립학교의 임시 교사로 위장 취직한다. 이 한심한 작자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세상이 얼마나 엉망인지 열변한다. 세상은 소수의 잘난 양반들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너희는 모두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저주까지 퍼붓다가, 예전에는 락이라는 수단으로 이들에게 저항했다는 노스텔지아까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낸다. 듀이의 눈에는 오로지 부당한 세상과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진정한 락커인 나만이 존재한다. 자신이 끼친 민폐와 범죄 행위는 락커의 저항으로 포장된다.
어김없이 애들은 자습시키고 퇴근만 기다리던 듀이의 눈에 아이들의 재능이 발견되고 만다. 음악 수업 시간 아이들의 연주를 듣고 탁월한 재능을 발견한 듀이는 아이들을 속여 락 밴드를 결성한다. 목적은 락 경연 대회의 우승 상금! 순진한 아이들은 듀이의 욕심에 이용당하게 된다. 평생 락 음악이라곤 접해본 적 없는 아이들과 교육이라곤 해본 적 없는 삼류 락커 선생님의 밴드 결성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보컬 학원으로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테스트를 봤다. 어? 이렇게 갑자기 노래를 시킨다고?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일단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방에서만 불러봤는데 쌩(?) 목소리로 나오는 내 노랫소리가 처음 들어본 소리처럼 어색했다. 긴장감에 몸이 굳어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았다. 문제는 레슨 수업에서도 이 긴장감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팽팽한 실 같은 긴장감. 즐겁지 않은데 계속 다니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엘리트 교육만 받아본 아이들도(평생이래 봤자 10년도 안 됐지만, 어쨌든 평생) 처음 접해본 락 밴드 음악이 어색했다. 아이들은 듀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듀이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밴드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친다. 듀이와 함께 밴드를 하며 아이들은 조금씩 변화한다. 충동성이 강하고 집중력이 약해 문제아로 보였던 아이는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보이는 드러머로 인정받고, 오로지 클래식곡만 연주하도록 강요받던 아이는 강요에서 벗어나 락 음악을 작사 작곡하는 멋진 락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조금 더 용기 내어 락 페스티벌에도 도전해 봤다. 넓은 송도달빛공원 공터에 멍하니 서 있는 내 모습은 락 밴드 경연장에 있는 초등학생처럼 어색했다. 난생처음 겪어본 슬램, 서클핏 등의 문화가 낮설기만 했다. 송도달빛공원은 주변에 높은 건물이나 산이 없어 8월의 뙤양볕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륵 흐르는 데, 수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엉켜 뛰어 다니면 금새 땀 냄새와 뜨거운 습기가 코를 찔렀다.
역시, 평소 안 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냐고? 그와 정반대였다. 상상 이상의 무더위에 순식간에 땀 범벅이 되었고, 낮 내내 공연장에서 뿌려대는 물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그렇게 물에 젖었다가 몸이 햇볕에 몸이 마르기를 반복하면 퀘퀘한 냄새가 지독하게 난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노는 사람들과 그 무리 속에 들어가 있는 나.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며 보낸 사흘이 꿈처럼 느껴졌다.
듀이는 이 과정에서 억압받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된다. 부유한 부모님을 만나 잘 살 것만 같았던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와 학업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오로지 학교밖에 모르고 남들이 불편해하는 건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던 교장 선생님에게도 억압은 있었다. 학부모의 압박과 직책이 주는 책임감이 주는 어마무시한 압박감이 교장 선생님을 학교만 바라보게 만든 것이었다.
평생 하지 않았던 행동이 아이들에게는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듀이에게는 성장의 기회를 주었다.
누구나 나를 짓누르는 압박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건 지구에 사는 한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중력과 같아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가끔 새로운 도전을 해본다면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공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른다. 내가 한여름 공터에서 뛰어다니는 걸 좋아할지도.
written by. 생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