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어느 장면을 보여주더라도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강박적인 대칭 구조, 파스텔 톤의 색감, 직선의 카메라 이동, 연극적인 연기 등 그의 작품은 매우 구조적이다. 화면과 연출만이 아니라 플롯의 구성마저도 구조적인데, 이러한 이유로 액자식 구성의 서사가 많다. 웨스 앤더슨의 작품은 왜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까?
서사 예술에서 구조적이라는 것은 곧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기능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영화가 기능적이라는 것을 인식한 관객은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해서 관람하기보다는 ‘해석’하며 영화를 보게 된다. ‘해석’ 한다는 것은 이야기에서 한 발짝 정도 떨어져 ‘객관적’으로 ‘의미’를 분석한다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 영화는 의도적으로 관객과 작품 속 세계 간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독창적인 연출 방식을 채택했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왜 관객의 이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할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WXYZ TV의 촬영 세트장에서 시작한다. 사회자는 ‘애스터 로이드 시티’라는 연극 제작 과정을 재현할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연극은 실존하지 않은 허구의 연극이다. TV 프로그램에서 곧바로 연극의 이야기로 한 층위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주요 스토리는 바로 가장 깊은 층위인 연극의 이야기로 표현된다. 이미 복잡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떨어지면 현실 세계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 정리하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 > 영화에 등장하는 TV 프로그램 > TV 프로그램 안에 등장하는 연극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다층위의 작품으로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더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차원으로 연결되는 이 관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연극 속 이야기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연극이라는 점이다. 현실의 우리는 가상의 이야기인 ‘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에는 또다시 가상의 이야기인 ‘연극’이 등장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영화 자체도 가짜인데 그 안에 등장하는 연극마저 가짜라고 한다. 그럼 가짜 이야기 중에서도 가짜 이야기인 ‘연극’은 현실 세계의 관객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바로 이 의미 없음에 대한 영화다.
클라이막스 장면에 이르면 관객(현실) > 영화 > TV 프로그램 > 연극의 4중의 레이어가 한순간에 깨지게 된다. 연극 속 주연 배우가 갑자기 연극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세트장에서 벗어나 TV프로그램 세트장으로 들어간다.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레이어가 이어진 순간이다. 그뒤로 TV 프로그램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현실의 관객으로 레이어가 순차적으로 깨지고 연결된다. 무의미의 세계에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나온 순간 비로소 의미가 튀어나왔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웨스 앤더슨은 왜 관객의 몰입을 막을까? 그건 바로 관객이 작품에서 반 발자국 멀어졌을 때 객관적으로 영화 속 상황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곧 거리두기와 동일한 기능을 한다. 삶에 질문을 던지는 순간 삶과 관찰하는 자아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이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유로 이어진다. 질문이야말로 의미의 탄생이다.
우리 피큐팀은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과 세상의 의미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모두에게 질문하는 순간이 있기를 바라며, 질문을 던지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씩 구독자분들께 글을 발송하고 있다.
written by.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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